경영보폭 넓히자마자 ‘사촌’한테 밀려 시련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경영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권에 도전했지만 실패를 맛봤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정 부회장의 활동 폭이 줄어든 것에 대해 재계 한 관계자는 “유통업계 침체기도 한몫했겠지만 일부 사생활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스스로 몸을 감춘 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유통업체에 대한 정부 규제, 협력업체에 대한 갑질 논란, 이마트 직원 사찰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 부회장이 비난의 대상이 된 것도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신세계 내부에서는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할 것”이라는 자조 섞인 말까지 흘러나왔다.
그러던 정 부회장이 지난 5월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 경쟁에 뛰어들면서 확 달라졌다. 신세계는 지난 5월 14일 서울 소공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명품관을 앞세워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룹의 모태이자 상징인 백화점 본점을 면세점 후보지로 선택했다는 것에서 의지가 엿보였다. 또 이날 신세계와 이마트는 각각 삼성생명 지분 300만 주(1.5%)씩, 총 600만 주를 매각해 6500억 원의 실탄도 마련했다. 그만큼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에 승부를 걸었던 것.
신세계의 면세점 사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정 부회장으로 알려졌다. 2012년 11월 부산 파라다이스 면세점을 인수하면서 면세점 사업에 진출한 이후 지난해 4월 김해공항 면세점에 이어 지난 2월 인천공항 면세점 사업 선정까지, 면세점 사업 노하우를 축적하면서 정 부회장이 자신감을 얻었다는 평가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사업이 침체를 벗어나기 힘든 데다 ‘교외형 복합쇼핑몰’ 사업에 대한 확신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정 부회장이 검증된 면세점 사업 쪽에 집중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수년 전만 해도 신세계는 면세점 사업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다지 매력적인 사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앞의 유통업계 관계자는 “당시에는 대형 마트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여서 다른 곳에 눈 돌릴 필요가 없었다”면서 “그러나 중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면세점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알려지면서 생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사촌동생인 이부진 사장의 호텔신라가 호텔사업보다 면세사업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에 정 부회장이 자극받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러나 면세점 사업에 대한 정 부회장의 의지는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권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한풀 꺾이게 됐다. 올 연말 사업 허가 기간 만료가 다가오는 롯데 소공동·잠실 면세점 입찰이 예정돼 있지만 유통 라이벌 롯데를 상대로 해야 하기에 지금보다 더 힘든 승부가 예상된다.
관세청 면세점 특허심사위원회는 지난 10일 오후 5시 인천공항세관 수출입통관청사에서 서울시내 신규 면세점 대기업군 사업자로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신세계가 ‘0순위’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한화가 호텔신라와 함께 사업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범삼성가에 사업을 몰아줄 수 없다’는 부담과 신세계가 후보지로 삼은 곳의 주차 문제가 큰 약점으로 지목됐다는 후문이다. 정 부회장의 사촌동생 이부진 사장의 호텔신라가 현대산업개발과 손잡고 경쟁에 뛰어들면서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자 범삼성가인 신세계가 위험해졌다는 진단이 현실화한 것이다.
또 신세계가 후보지로 선택한 백화점 본점 부근은 가뜩이나 교통 정체로 몸살을 앓는 지역이다. 더욱이 소공동 롯데면세점에 이어 신세계 면세점까지 들어서면 이 지역의 교통이 아예 마비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신세계 관계자는 “처음부터 주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놓고 있었다”고 자신했지만 소용없었다.
반면 유력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던 한화의 ‘승리’에 놀라는 사람이 적잖다. 지난해 초 김승연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박근혜 정부의 ‘한화 몰아주기’가 심상치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화는 삼성그룹의 방산·화학 계열사 인수에 성공한 데 이어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까지 획득하는 등 하는 일마다 잘 풀려나가고 있다.
서울 장충동의 신라면세점(왼쪽)과 서울 소공동의 롯데면세점. 이번 사업자 선정에서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에 밀려 탈락한 신세계가 올 연말 롯데면세점 입찰에 또 한번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일요신문DB
비록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 진출에는 일단 실패했지만 정용진 부회장은 드림커머스 인수를 통해 ‘TV 전자상거래’로 불리는 T커머스 시장 진출에는 성공했다. 신세계는 지난 7일 미래창조과학부(미래부)로부터 ‘드림커머스 최대주주 변경 안건을 승인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신세계는 지난해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T커머스 시장 진출을 노린 바 있다.
정 부회장은 해외 사업도 맨 앞에서 이끌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올해 말 개점 예정인 베트남 이마트 1호점. 사실 이마트가 베트남 진출을 선언한 것은 4년 전인 2011년이다. 4년 만에야 비로소 1호점 개점을 눈앞에 둔 것은 중국에서 실패한 경험이 크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유통업계 다른 관계자는 “월마트, 까르푸 등이 우리나라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유통업체가 해외에 진출해 성공하기는 굉장히 어렵다”며 “이마트 역시 한창 잘나가던 시절 중국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으나 실패했다”고 말했다.
베트남 진출에 정 부회장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지화’다. 중국 사업 실패의 가장 원인을 현지화 실패에서 찾은 것이다. 정 부회장도 스스로 “해외사업을 쉽게 생각했다”며 “중국 사업 부진으로 정신 차렸다”고 말한 바 있다.
정 부회장이 최근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재계에서는 경쟁사의 다른 오너들에 비해 조용한 모습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특히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오너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보여야 한다는 필요성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심지어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던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마저 최근 경영 능력과 사업 역량을 활발히 표출하고 있는 터에 정용진 부회장만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 재계 한 인사는 “정용진 부회장 주변 사람들과 신세계 내부에서 이제는 경영자로서 면모를 적극적으로 보여야 할 때라는 조언을 한 것으로 안다”며 “다만 SNS활동 재개는 정 부회장 지인들이 바라던 게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정 부회장의 행보에 우려의 시선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사활을 걸었던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에 실패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백화점 본점을 후보지로 내세우면서까지 힘을 쏟았으나 결과적으로 사업자에 선정되지 못함으로써 향후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유통업체로서 가장 크고 확실한 신성장동력이 면세점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T커머스 시장 진출 역시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원래 신세계가 원하던 사업은 홈쇼핑이었다. 비록 T커머스 분야가 홈쇼핑의 미래 사업쯤으로 여겨지고는 있으나 성과를 내기에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중국에서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의욕을 내비치고 있는 베트남 사업은 실제로 이마트 1호점을 개점한 후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4년 만에 경영자로서 면모를 적극적으로 보이고 있는 정용진 부회장이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충격을 어떻게 극복해낼지 궁금하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사업자 선정 발표일 증시 반응 “소문이 그대로…유출된 거 아냐” 관세청이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 결과를 발표하는 지난 10일, 증권가는 요란했다. 10일 호텔신라, 신세계, SK네트웍스, 한화갤러리아 등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 전쟁에 뛰어든 기업들 주가는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장 초반 대부분 상승세를 보이던 이들 기업의 주가는 오전 10시 30분께 완전히 갈렸다. 한화갤러리아와 호텔신라가 강세를 보였고 신세계와 SK네트웍스는 이 시간을 기점으로 급락했다. 이유는 증권가와 경쟁업체들 사이에서 ‘호텔신라와 한화가 선정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 특히 유력 후보였던 신세계가 탈락하고 당초 4순위 안에도 들지 못했던 한화가 이미 선정됐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장 초반 사업자 선정 기대감으로 강보합 양상을 보이던 신세계는 8.97%나 하락한 채 마감했으며 한화는 30%까지 확대된 가격제한폭까지 치솟았다. 입찰에 참여한 업체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점심 때부터 심사에 들어갈 예정인데 이미 오전에 알려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 결과는 까봐야 안다”면서 “만약 소문이 현실로 된다면 사전 정보유출 문제로 봐야 하고, 단지 소문에 불과했다면 작전세력 개입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다. 결국 관세청 발표 결과는 오전에 나돌았던 소문대로 됐다. 이 외에도 면세점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10일 오후 5시 발표가 있기 전까지 온갖 소문이 무성했다.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이 얼마나 큰 이슈였는지 방증하는 대목이다. [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