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마케팅’ 참석 CEO 예행 연습중
현대중공업이 정기선 상무의 경영권 승계를 되도록 빨리 진행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울산 현대중공업 전경. 연합뉴스
1982년생으로 올해로 33세인 정 상무는 청운중학교와 대일외국어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2005년 육군 ROTC로 입대해 중위로 전역했다. 첫 사회생활은 크레디트스위스(CS) 인턴사원 근무였으며, 이어 동아일보 인턴기자를 지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2001년 별세)의 넷째 동생인 정신영 씨(1962년 작고)가 동아일보 기자였으니, 범 현대가와 동아일보의 인연은 이렇게 또 이어졌다.
정 상무는 2009년 현대중공업에 대리로 입사했으나 반 년 만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수료하고 2011년 돌아온 그는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 컨설턴트로 1년 9개월 동안 근무했다. 그해는 할아버지인 정주영 창업주의 10주기를 맞아 범 현대가에서 다양한 추모행사를 진행했는데, 6월 23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아산사회복지재단 창립 43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재단 이사장인 아버지와 함께 정 상무가 참석했다. 당시 기자들과 만난 그는 피하지 않고 환한 표정에 예의를 갖추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기도 했다. 기자 출신인 만큼 언론 응대 방법을 자연스레 익혔기에 가능했다.
정몽준 전 대표와 그의 아들 정기선 상무.
현재 그의 직함은 안전·경영지원본부 상무다. 안전과 기획, 영업 등은 조선사에서도 핵심업무에 속한다. 이를 모두 관장하는 안전·경영지원본부에 배치된 것은 정 상무에게 본격적으로 최고경영자(CEO)로서의 능력을 전수한다는 점, 또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회사의 운영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다.
정 상무는 현재 울산에 머무르고 있다. 서울 사무소에 가끔 온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있다가 갔는지는 서울사무소 직원들 누구도 모른다. 그만큼 티를 내지 않는 그의 성격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정 상무의 위상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정 상무는 지난해부터 미국 휴스턴에서 열리는 세계해양박람회, 그리스에서 열리는 포시도니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선박·조선·해양기술 기자재박람회(SMM) 등 주요 조선업 관련 박람회에 연이어 참석해 전 세계 메이저 선주사 대표들과 만나는 등 선주사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해외 주요 거래선들과의 면담을 통해 경영 후계 수업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수주산업인 조선업은 선주들과의 VIP 마케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선박 또는 해양 플랜트 발주를 하는 선주들은 전통적인 오너 일가이기 때문에 조선사들도 오너 일가 CEO들이 상대하는 것이 수주 성공의 플러스 요인이 된다고 설명한다.
조선업의 특성을 반영해 정 상무의 CEO 승진 시기는 5~7년 후, 즉 2020년을 전후에 이뤄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시기가 빨라지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3조 원이 넘는 대규모 부실을 회계에 반영한 현대중공업은 최길선 회장·권오갑 사장 체제로 전환한 뒤 조선 계열 3사의 중복업무 통합, 희망퇴직을 통한 인력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룹 차원에서 비롯된 구조개편의 마지막은 지주사 출범 또는 조선 계열사 통합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데, 이러한 작업의 지향점은 결국 정 상무의 경영 대권 인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전문경영인체제를 믿어왔던 정 전 대표가 엄청난 실망을 했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경질된 이재성 전 회장은 정 전 대표와 서울 중앙중·중앙고·서울대 경제학과 동기 동창으로 50년 지기의 막역한 사이였다. 재무통인 이 전 회장은 정 전 대표의 전적인 신임을 받으며 민계식 전 회장까지 밀어내고 대표이사에 등극, 회장으로 승진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얼마가지 못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은 정 전 대표에게 회사의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혼자서 일을 했다. 그 일을 잘했으면 모르겠는데, 문제를 무조건 숨기려고 하고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규모 부실이 터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대주주가 결국 친구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살아나려면 지배구조가 개편돼야 하는 게 최우선이다. 이에 정 전 대표가 경영에 복귀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는데, 그가 회사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아들 정 상무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할 것이며, 정 상무의 경영수업 강도도 훨씬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은 아직 정 상무의 경영권 승계 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되도록 빨리 진행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8년을 넘기기 전에 최소한 사내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의 권한을 쥘 수 있는 자리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재계 관계자는 “33세인 정 상무가 나이가 어려서 회사 경영을 물려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부친은 31세에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다는 점을 비교하면 나이라는 핑계를 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정 전 대표는 자식에게 회사를 맡겠다면 제대로 맡아보라는 차원에서 공부를 시키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며 “문제는 정 전 대표가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주식을 어떻게 정 상무에게 물려주느냐는 것이다. 당장 그대로 물려주려면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하는데 정 상무는 그만큼의 돈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주식 세금을 내지 않고 정 상무가 회사를 접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중이고, 현재 현대중공업그룹의 구조개편도 이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추정에 근거한다면 빠르면 올 연말, 늦어도 1~2년 내에 현대중공업 그룹이 정 상무 체제로 바뀔 전망이다.
조정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