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임원 찾고 한밤중 호텔 옥상에…
카메라만 멍하니 응시 롯데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 이상설이 돌고 있다. 신 총괄회장이 7월 28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는 지난 7월 27일에 있었던 신격호 총괄회장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처음엔 침착하고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대화 도중에 ‘어?’라고 생각 드는 국면이 있었다. 같은 질문을 다시 하거나 내가 말씀드렸는데 다시 말씀하거나 내가 일본 담당인데 한국이랑 헷갈려하기도 했다”며 자세한 설명도 곁들였다. 쓰쿠다 사장은 지난 2009년 신 총괄회장에 의해 일본 롯데홀딩스 사장으로 스카우트 된 뒤 롯데의 핵심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그의 건강에 대한 진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을 곁에서 지켜봐온 전·현직 롯데그룹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알츠하이머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증언도 흘러나온다.
한 언론은 신 총괄회장 측근의 입을 빌려 “매일 두 종류의 알츠하이머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재계에서는 “죽은 임원을 찾았다” “아침에 보고를 받고도 오후에 보고를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 다시 되돌아갔다” “한밤중에 호텔 옥상에 올라간 총괄회장님을 직원이 모셔 내려왔다”는 등의 관계자들의 증언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동빈 회장 지지 결의문을 냈던 한 롯데 계열사 사장은 언론에 “그동안 제기된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에 대한 소문들은 사실이 맞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7월 31일 그의 숙소가 있는 소공동 롯데호텔에 롯데그룹 오너 일가족을 취재하기 위해 모인 기자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여기에 신동빈 회장도 지난 3일 김포공항 입국장 기자회견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이 정상적인 경영판단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대답하기 힘들다”고 말해 건강이상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 회장의 이 같은 태도는 이번 형제 간 전쟁이 터지기 전날까지 ‘신격호 총괄회장이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관계자들에게 직접 의견을 전달했다’며 홍보하던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하루아침에 바뀐 롯데그룹의 태도에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아들 입장에서는 숨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과 함께 ‘신격호 건강이상설’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양측의 상반된 주장을 떠나 최근 보여준 신격호 총괄회장의 언행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지난 7월 28일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신격호 총괄회장은 기자들이 쏟아내는 질문에도 카메라만 멍하니 응시할 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여기에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공개한 신격호 총괄회장의 육성녹음, 동영상은 논란에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됐다. 영상 속 신격호 총괄회장의 어눌한 말투와 잘못 말한 단어, 과거 자신의 지시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발언 등이 문제가 되면서 오히려 롯데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충분했다.
신격호 총괄회장은 의자에 앉아 어딘가에 적힌 메모를 보고 말을 이어나갔는데 자주 흐름이 끊기고 발음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또 2011년 자신이 차남을 한국 롯데 회장으로 임명한 사실을 잊은 듯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 롯데홀딩스를 ‘한국 롯데홀딩스’로 읽는 실수까지 그대로 노출됐다.
롯데 측에 따르면 지난 3일 일본에 다녀온 신동빈 회장을 보고도 별다른 말없이 “어디에 다녀왔었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바로 전날 동영상을 통해 “용서할 수 없다”던 아들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연합뉴스)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이 각각 7월 29일과 8월 3일 김포공항 통해 입국했다.
이러한 신격호 총괄회장의 모습을 두고 의료계에서도 그의 건강상태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하지만 기자가 만난 전문의들은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전제조건 아래 “일반적인 노환 증세는 아닌 것 같다”는 의견에 대체로 동의했다.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동영상 등을 분석하며 “지금까지 언론에 공개된 신격호 총괄회장의 특이행동은 알츠하이머 치매 초기 증상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질환으로 서서히 발병하여 기억력을 포함한 인지기능의 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병이다.
또 다른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체력저하, 기억력 감퇴는 고령에게서는 일반적으로 보이는 증세다. 하지만 신격호 총괄회장은 흔히 치매 전 단계라 불리는 경도인지장애를 넘어선 수준으로 판단된다. 과거 고관절 수술 이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지금과 같은 상황(분쟁) 자체가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해 건강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13년 말 신격호 총괄회장은 낙상으로 인해 고관절(대퇴부경부) 골절상을 입고 수술을 받은 바 있다. 고관절 골절은 노년층에게선 생명까지 위협하는 부상이다. 대수술로 인한 체력적 부담이 심할 뿐 아니라 각종 후유증, 합병증이 동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인병 전문 정을조 진주복음병원 진료원장은 “고관절 골절 수술은 체력적, 정신적으로 고령의 노인이 견뎌내기 힘든 과정이다. 전신마취에 대한 부담, 면역력 저하에 따른 합병증 발병 가능성도 높다. 또 수술 후 1~2개월가량의 오랜 입원기간 동안 제대로 영양 보충을 받지 못하고 운동도 못해 혈액순환 장애를 겪기도 한다. 이로 인해 혈전이 생기고 결국 뇌경색, 색전증으로 위급상황을 맞는 사례도 있다”며 “수술에 대한 스트레스가 과도하면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까지 찾아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격호 총괄회장의 증세는 단순한 노환에 따른 것이라 주장하는 측도 있다. 롯데그룹 오너 일가에 건강 자문을 해온 유명철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석좌교수는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신격호 총괄회장이) 연세가 있어 기억력이 떨어진 것일 뿐 치매설은 낭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신동주 전 부회장이 공개한 동영상 속 모습에 대해서는 “평소 모습과 달라 생소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의료계에서도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고 있지만 막상 두 아들은 아버지의 건강을 두고 제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있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상태가 어떤지에 따라 각자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신격호 총괄회장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가 아니라면 신동주 전 부회장이 내놓은 지지서 등은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반대로 신격호 총괄회장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면 아버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 신동주 전 부회장이 유리해진다. 경영권을 놓고 벌이는 막장전쟁만으로도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각자 손익계산에 따라 아버지의 건강을 달리 보라보는 두 아들의 모습은 더욱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