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이유 없어~ “당신의 열정엔 유통기한이 있수?”
▲ 전 국민을 웃음의 도가니에 빠트린 ‘죄민수’ 조원석. 그의 개그 뒤엔 10년간의 무명 생활이 녹아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이 순식간에 벌어질 수는 없는 법. 조원석 역시 10년여의 무명 생활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개그맨 조원석 이전의 인간 조원석, 자신의 꿈을 위해 10년을 쉬지 않고 내달려온 그를 김태진 리포터가 만났다.
인터뷰는 대학로의 한 가든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겸해 이뤄졌다. 대학로는 대부분의 개그맨에게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공간이다.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어렵게 개그맨의 꿈을 키워온 개그맨들이 많기 때문. 조원석 역시 마찬가지다.
김태진(김): 오랜 기간 연예인의 꿈을 키워왔을텐데 개그맨이 되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조원석(조): 전 이런 얘기 자주 합니다. ‘운명’이라고.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게 스무 살 때였어요. 학창시절에는 굉장히 말수가 적은 아이였죠. 많은 분들이 믿지 않는데 지금도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고요. 그런데 운명적으로 개그에 끌렸어요. 그때부터 개그맨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죠.
김 : 다른 개그맨들처럼 대학로 소극장에서 개그를 시작한 건가요.
조 : 지금은 대학로에 소극장이 많아 문하생으로 들어가 청소부터 하면서 개그를 배울 수도 있지만 당시엔 방송 3사 공채 시험 합격이 아니면 개그맨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가 없었어요. 97년부터 개그맨 시험을 보기 시작해 11번 재수 끝에 2003년, 겨우 합격했습니다. 97년엔 ‘전문대 재학 이상’의 학력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개그맨 시험 보려고 방송통신대에 입학도 했어요.
김 : 지금은 제일 잘 나가는 개그맨 가운데 한 명인데 열한 번이나 떨어진 이유가 뭐였나요? 그때는 실력이 없었나요.
조 : 에이~ 별 말씀을. 일단은 연극 영화나 방송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에 비해 당연히 실력이 현저히 떨어졌죠. 그때 어떻게 시험을 봐야 하는 지도 몰랐어요. 다른 지원자는 몇 달씩 시험을 준비하는데 저는 조리사로 일하다 일 년에 한 번 가서 시험을 보니까 될 리가 없었죠. 매번 1차에서 탈락했어요. 2000년에 조리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2003년에 겨우 공채 시험에 합격했던 겁니다.
6년 동안 10전 11기의 과정을 거쳐 SBS 7기 개그맨 공채 시험에 합격해 개그맨의 꿈을 이뤄낸 조원석. SBS 7기 공채 개그맨은 방송사에 개그맨 공채 제도가 생긴 이래 역대 최강의 멤버들로 불리고 있다. 김재우 윤택 김형인 정만호 김기욱 윤진영 김태현 김신영 이강복 박상철, 그리고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김형은 등이 조원석의 동기들이다. 30%대 시청률을 자랑하던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의 초반 전성기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조원석은 없었다.
김 : 공채에 합격한 2003년에 <웃찾사>가 인기를 끌면서 동기들은 하나같이 스타덤에 올랐는데 유독 조원석 씨만 뒤쳐진 이유가 뭔가요.
▲ 김태진 리포터와 함께 포즈를 취한 조원석(위). MBC <개그야> 중 ‘최국의 별을 쏘다’ 한 장면. | ||
김 :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조 : 나한테 무슨 마가 꼈나 싶었어요. 하지만 잠깐이었죠. 아무리 힘들어도 저는 될 거 같았어요. 평생 얼굴에 분칠하고 살 것 같았거든요. ‘나도 언젠가 될 수 있다. 다만 언제인지만 모를 뿐이다. 이주일 선배도 방송은 마흔에 데뷔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위험한 생각이었죠. 어쩌면 아직도 어두운 대학로 소극장에서 노트를 들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김 : 개그맨은 누구나 대학로에 얽힌 추억이 있기 마련이라는데 조원석 씨도 그런가요.
조 :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삼식이’(김완기)랑 (김)형인이랑 같이 밤새워 술을 마시곤 했어요. 술값은 표를 팔았어요. 공연 표를 파는 ‘삐끼’를 하면 3000원 정도를 줬거든요. 혜화역 4번 출구 앞 포장마차 행렬 제일 마지막에 아저씨가 하는 골뱅이 집이 있어요. 거기 가면 양을 많이 줘요. 표 판 돈 몇 천 원씩 모아 술을 마셨는데 그 돈도 없으면 마로니에 공원에서 참치 캔에 소주를 마셨죠. 마시다 보면 당연히 차 없지, 택시비 없지. 그냥 기다렸어요. 첫차 다닐 때까지 마로니에 공원에 셋이 쭈그려 앉아서.
컬투엔터테인먼트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대학로로 돌아온 조원석은 본격적인 스타 탄생 준비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컬투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온 최국은 조원석의 SBS 개그맨 공채 1년 선배다. 그 이전에는 별다른 친분이 없던 두 사람은 ‘깔깔이’ 코너를 진행하며 가까워져 지난해 가을부터 잦은 술자리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그렇게 ‘최국의 별을 쏘다’라는 코너가 탄생한 것이다.
김 : ‘최국의 별을 쏘다’는 본인 아이디어인가요.
조 : 아뇨. (최)국이 형 아이디어에요. 저는 캐릭터 스타일, 국이 형은 아이디어 뱅크거든요. 대학로에서 먼저 한 달 정도 공연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지방에서 열린 대극장 공연에서도 반응이 심상치 않아 방송에서의 성공을 확신했죠.
김 : 제작진 반응이 별로 안 좋아 어렵게 방송을 탔다고 하던데.
김 : ‘죄민수’로 무대에 선 첫 방송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조 : 당연하죠. 첫 녹화가 지난해 12월 26일이었는데 하필 그날 국이 형이 많이 아팠어요. 리허설 마치고 병원에 가서 링거 맞고 돌아와 녹화에 들어갔으니 말 그래도 ‘링거 투혼’이었죠. 공연장보다 반응이 뜨겁지 않아 다소 실망했는데 제작진은 성공적이라는 반응이었어요. 김정욱 부장님이 직접 내려와 격려해줬을 정도니까.
김 : 시청자들의 반응은 첫 회부터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 : 첫 방송은 1월 1일에 방영됐어요. 성공을 예감한 제작진이 편집을 길게 해줘 첫 회 방송분이 7~8분가량이나 됐어요. 다른 코너는 보통 3~4분 정도거든요. 월요일 방송이 나가고 화요일에 택시를 타고 녹화장에 가는 데 국이 형한테 전화가 왔어요. 흥분한 목소리로 제게 “야! 야 이 새끼야. 너 떴어!”라고 하더군요. 가서 보니 그날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1위 ‘죄민수’, 2위 ‘별을 쏘다’ 3위 ‘조원석’이더군요. 그걸 보니 정말 떴다 싶더라고요.
김 : 인기를 얻어 유명인이 됐지만 안 좋은 점도 있을 거 같아요.
조 : 행동 제약 받는 게 좀 그렇죠. 특히 같이 있는 일행들에게 되게 미안하잖아요. 데이트도 하기 힘들고. 보통 연예인을 보면 ‘맞나 맞나?’ 하는데 저한테는 그냥 바로 와요. 되게 친한 척을 해요. “사진 한 장 찍어요. 제가 술 한 잔 줄게요”하면서 접근하는데 처음엔 당황스러웠죠. 한번은 지나가던 택시 안의 승객이 창문을 내리더니 “원석아!”그러시는 거예요. 아는 분인가 싶어 인사를 하니까 “아무 이유 없어!” 라면서 가시더라고요.
김 : 데이트가 힘들면 애인이 있다는 얘기네요.
조 :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데 아직 사귀고 뭐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평범한 직장인인데 어디 같이 다니고 그러기도 힘들어요. 시간이 안 맞아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아직 좋아한다는 말도 못했어요.
10년여의 무명 생활을 거쳐 스타의 반열에 오른 조원석. 앞으로 그의 목표는 죄민수가 아닌 본명 조원석을 알리는 데 있다. 그가 꿈꿔온 진정한 개그의 세계가 이제 막 시작된 만큼 죄민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고 싶단다. 최근 새롭게 시작된 코너 ‘꼽사리’를 시작한 그는 예능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조원석이라는 이름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급상승한 인기는 여차하는 순간 급하락하기도 한다. 조원석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를 걱정하진 않는다. 그가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닌 열정을 먹고 사는 개그맨임을 알고 있으니까.
정리=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