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울 줄만 알았고 지킬 줄은 몰랐다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년이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불과 10년 전까지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재계의 그저그런 대기업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석유화학과 운송·물류 서비스, 건설사업 등을 통해 견실하게 성장해 나왔다. 하지만 2006년 이후부터 사실상 그룹은 뒷걸음질쳤다. 지난 10년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심한 굴곡을 겪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석유화학과 운송·물류 서비스, 건설사업 등을 통해 견실하게 성장해 나왔지만 2006년 이후부터 사실상 뒷걸음질쳤다.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 등 박삼구 회장(왼쪽)의 과욕이 빚어낸 결과라는 지적이다. 일요신문 DB
결국 총수인 박삼구 회장에게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박삼구 회장만큼 “무모할 만큼 저돌적이다”와 “과욕이다”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오너는 없다.
1945년생 해방둥이인 박 회장은 1967년 삼양타이어에 입사한 뒤 한국합성고무에 이어 금호실업 대표이사 사장, 금호 대표이사 사장,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사장 및 부회장, 금호그룹 부회장을 거쳐 2002년 9월 그룹 회장에 올랐다.
1984년 창업주 박인천 회장의 별세 후 그의 자식 5남 3녀 가운데 그룹 경영에 관여한 이는 공직생활을 한 막내 박종구 전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현 초당대학교 총장) 및 딸들을 빼고 4형제들이다. 박 상무는 이들 가운데에서 가장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일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특히 맏형 고 박성용 명예회장과 둘째인 고 박정구 회장이 그룹을 맡았을 때에는 수성에 치중하며 안정을 도모한 데 반해, 박 회장은 끊임없이 확장을 추구했고 이러한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바로 1988년 설립된 아시아나항공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은 둘째 형인 박정구 회장의 결정으로 시작했지만 사업초기 대한항공에 치여 숨 쉴 공간마저 부족한 아시아나항공을 단기간 내에 세계 중위권 항공사로 키운 건 박 회장이었다. 박 회장의 추진력은 아버지인 창업주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아시아나항공의 성공적인 안착은 박 회장에게 경영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그의 야심은 2002년 회장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대우건설 인수전 참여를 선언하며 본색을 드러냈다. 이를 통해 박 회장은 그룹 성장전략을 창업이 아닌 기업 M&A로 바꿨다. 그룹 사정으로 봤을 때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이 취임했을 때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유화와 운수, 항공 등 대표 주력사를 통해 일정 수준의 수익을 내긴 했지만 대박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룹 성장의 활로를 뚫어줄 신성장 사업에 대한 요구가 강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회사를 차려서 키우려면 너무나 긴 시간이 소요됐고, 성공 가능성도 낮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출신 전직 임원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전 계열사 가운데 부문별로 글로벌은커녕 내수시장 1위를 하는 기업이 없었다. 1등을 못하는 기업은 만년 그림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명도 오래가지 못하다는 것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다분한 박 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뻔히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떤 분야에서라도 1위의 지배력을 갖고 싶어 했고, 이러한 1등 의식을 전 계열사에 전파하고자 했다. 이에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자 M&A에 눈을 돌린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회장이 인수에 성공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은 각각 건설과 물류 쪽에서 국내 1위 업체다. 대우건설은 금호건설과 연결해 건설 부문 수위를 차지할 수 있고, 대한통운은 아시아나항공 등과 연계해 육상·항공 물류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사업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에 따라 무리수를 두고 인수를 했다.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한 CJ대한통운빌딩과 신문로에 위치한 대우건설 본사.
1위 기업 소유를 통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주도하고 싶었던 박 회장의 의도도 M&A를 고집한 또 다른 배경이었다. 또 다른 금호아시아나 그룹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의 성공적인 경영으로 자신감을 얻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도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여긴 것 같다. 개성이 강한 문화의 두 기업이지만 충분히 금호의 문화에 융합시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두 회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형제간 경영승계, 즉 동생 박찬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러주지 않고 그룹을 장악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대우건설 등의 M&A는 ‘그룹을 실질적으로 키운 건 난데 왜 물려줘야해?’라는 욕심이 만든 산물이었던 것이다”고 전했다.
박 회장의 행보는 다른 최고경영자(CEO)들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확장 정책에 있어 가장 핵심인 ‘돈’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1, 2차 석유파동과 국제고금리 추세로 1차 위기를 겪으며 그룹 재정비를 통해 체질개선을 이뤄낸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아시아나항공 설립 후 영업 부진으로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하다가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두 번째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그룹이 해체될 수 있었지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살아났다.
생존은 했다. 그룹이 안정되자 박 회장은 그룹 외연의 확장에 나섰다. 내부 자금이 아닌 빌린 돈을 통해서. 아시아나항공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인수해서 정상화하면 돈은 쉽게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무리한 차입에 의한 기업 인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또다시 그룹을 파탄의 위기로 몰아갔고, 그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져,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잃어버린 10년’을 보내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아무리 부정해도 떼어내지 못하는 꼬리표가 있다. 호남 출신 기업이라는 것이다. 지방색을 두고 입에 오르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위기 때마다 살아나는 것을 보며, 외부에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호남 출신 권력자들의 보호와 지원을 받은 게 아니냐며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객관적인 증거로 오해를 풀면 된다. 하지만 박 회장은 은근히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대기업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되자, 박 회장은 유동성 위기를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상황 변화 탓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기보다 정치권 로비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구조조정을 압박한 민유성 당시 한국산업은행장을 두고 “금호를 죽이려 한다”고 반발했다. 대우건설 인수 당시 풋백옵션(인수 3년 후 대우건설 평균 주가가 기준가격을 웃돌지 못할 경우 투자자들의 차액을 보전해주는 옵션) 등 과감한 한 수를 내놓았던 그가 정작 그룹 구조조정이 코앞에 닥치자 ‘전라도 빽’을 믿고 소극적으로 임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CEO는 일을 벌리는 능력보다 수습하고 정리하는 수완이 더 중요하다. 박 회장은 전자에는 능할지 모르겠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했다. 내실을 추구했던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동생과의 인연도 끊고 석유화학 계열사를 사실상 내준 박 회장은 반쪽짜리 그룹을 지키기 위해서 모태인 금호산업을 되찾으려 채권단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채권단이 제시한 1조 원대의 인수가격은 돈 없는 박 회장에겐 큰 부담이다. 이런 상황에 호남 지역단체들이 적정가 인수를 주장하고 나서며 정치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은 관계가 없다고 해명하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룹 모태라는 점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인수를 해야할지, 깔끔히 포기하고 남은 계열사라도 지켜야 할지를 선택해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과욕의 후유증을 톡톡히 맛본 박삼구 회장은 금호산업에 대한 미련에 집착하다가 또 다시 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정우 언론인
박삼구 회장 ‘리더십’ 뒷말 무성 ‘소통맨’서 ‘불통맨’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들이 전하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최근 모습이다. 채권단이 1조 원대의 금액을 제시한 그룹의 모태 금호산업 인수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인 박 회장은 ‘고(Go, 인수강행)’냐, ‘스톱(Stop, 포기)’이냐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지 않고 전자에 치중한 채 후자의 의견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나이로 올해 칠순을 맞은 박삼구 회장의 조급함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당장 내년이면 그룹 창립 70주년을 맞기 때문에 그전에 그룹을 10년 전 모습으로 되돌려놔야 한다. 금호고속과 금호타이어에 이은 금호산업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인수라는 대전제를 놓고 방안을 풀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기업의 수익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상황인 데다가 그나마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나 박 회장에게 1조 원이라는 돈은 큰 부담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수가액을 낮춰야 하지만 채권단의 입장이 워낙 강경하기 때문에 협상은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룹 임직원들이 곤란을 겪고 있는 배경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임원 출신 관계자는 “채권단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한 것에 대해 많이 놀란 분위기다. 그런데, 그룹 내에서는 가격이 높고 낮고를 떠나 금호산업을 꼭 되찾아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기간 동안) 워낙 힘들게 보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만 잘 추스르고 나아가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오너의 욕심 때문에 그룹이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과의 갈등을 좁히지 못한 채 갈라서게 된 데에도 박 회장의 리더십의 한계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도전정신과 개척의지가 강한 저돌적인 박 회장과 모험보다는 안정을 우선시 하는 성격의 박찬구 회장은 뜻이 맞을 땐 서로의 단점을 상호보완해주며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지만 생각이 달라지면 평행선과 같은 관계로 돌변한다”면서 “이렇게 된 탓을 모두 박 회장에게만 몰아세울 수 없지만 한국의 사회 정서상 누가 잘못해도 결국 책임은 최고 책임자에게 돌아간다. 동생과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은 경영자로서 그동안 쌓아올린 경력에 큰 흠집을 남겼다, 금호산업 인수보다는 동생과 화해해 금호석유화학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박 회장을 상징했던 닉네임인 ‘소통’이 퇴색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직원들의 이야기에는 자세히 귀를 기울이는 자상함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박 회장이지만 경영 이슈에 대해서는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은 박 회장이 과거에 비해 변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룹 관계자는 “회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책임경영 차원에서 박 회장이 평소에 비해 발언의 수위를 높이고 있고, 금호타이어를 비롯한 그룹사의 경영을 더욱 꼼꼼이 챙기고 있는 것을 놓고 그런 소문이 도는 것 같다”면서 “하지만 박 회장은 모든 사안에 대해 계열사 전문경영진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