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붉은 조명 아래서 비밀스런 ‘워킹’
지난 7월 16일 밤 8시. 강남의 여성 전용 이벤트바(bar)의 간판에 불이 켜지자마자 여성 고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메워진 가게에는 모델을 연상케 하는 스타일리시한 남성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넨다. 시종일관 매너 있는 모습을 보이던 이들은 시간이 흐르자 곧 손님들을 위해 망가지는 것도 불사하는 어릿광대로 분한다. 다음날 아침 7시. 날이 밝자 이들이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 바로 런웨이를 누비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델들이 ‘모델’로 살아남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들이 무대 뒤에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일을 찾아 나서고 있는 것. 이들은 서빙이나 공사 현장의 막노동뿐 아니라 호스트바, 텐프로 등 유흥업소에 몸을 담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다. 물론 모델로 인정받아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면 별도의 아르바이트는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성공한 모델의 이야기일 뿐,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많은 모델과 모델 지망생들이 있다.
모델들이 유흥업소를 찾는 이유는 단기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점도 모델들의 구미를 자극한다. 유흥업소 관계자들도 외모나 스타일이 좋은 모델을 반기고 있어 모델들이 손쉽게 유흥업에 빠지고 있다. 모델 겸 연기자 지망생 정 아무개 씨(남·29)는 “길거리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 모델이냐고 묻더니 밤일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며 “안 한다고 했더니 호스트바에 모델들이 많다며 자꾸 권유해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모델 이 아무개 씨(남·26)는 모델 아르바이트에 대해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모델계에서 유명한 한 모델이 청담동의 한 클럽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있다는 것. 그는 “우연히 간 클럽에서 선배가 나체로 춤추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TV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려지기도 했다는 이 모델이 스트립을 하는 이유는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보수가 높기 때문. 이 씨는 “2년 동안 모델로서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선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했다.
수려한 외모에 늘씬한 몸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모델들이 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모델들은 ‘모델의 열악한 수익구조’를 꼽았다.
신인 모델이 패션쇼 무대에 한 번 서는 데 받는 돈은 15만~20만 원 선이다. 이는 연예인이 패션쇼 무대에 한 번 오르고 받는 돈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 만약 에이전시에 소속돼 있다면 수입의 20~30%는 소개비로 빠져나가 실제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에이전시에 소속돼 있다가 작년부터 개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모델 박 아무개 씨(여·25)는 “기획사에 소속돼 있으면 일이 정기적으로 들어오지만 소개비를 떼여 오히려 개인으로 활동하는 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대부분 모델들이 1년 이상 소속돼 있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 속옷 패션쇼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음. | ||
고정 수입이 없는 것도 문제다. 모델이라는 일이 불규칙하다보니 한 달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게 김 아무개 씨(여·24)의 설명이다. 김 씨는 “생활비를 벌려고 회사에 다니려고도 했지만 (모델 관련해)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취업을 하지 못했다”며 “낮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모델 일이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번번이 잘렸다”고 말했다. 이 씨도 “예전 옷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모델이라고 하니까 일이 들어오면 언제든지 빼주겠다고 해놓고선 막상 가야한다고 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디자이너의 횡포도 모델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최근 모델들이 가장 서고 싶어 하는 무대는 단연 ‘서울컬렉션’. 한국 유명 디자이너들이 총출동해 각광 받기 시작한 ‘서울컬렉션’은 최근 모델들 사이에서 꿈의 무대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2년간 서울컬렉션에 섰다는 한 모델은 ‘서울컬렉션’ 얘기를 꺼내자 고개를 내저었다. 유명 연예인이나 인기 모델은 몰라도 신인 모델들에겐 고통스러운 자리라는 것. 무대는 크지만 수입은 이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는 “몇몇 디자이너들은 ‘내 무대에 선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시간도 많이 뺏기고 돈도 못 받고 차라리 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더 낫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또 다른 모델도 “일 실컷 하고 돈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델로서 벌 수 있는 돈이 이렇게 적은데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유흥업소로 고개를 돌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모델들이 일하고 있다는 유흥업 관계자가 바라본 모델들의 모습은 어떨까. 한 유흥 업소의 종사자는 “외모가 어느 정도 되는 친구들이 호스트바나 텐프로에 많이 모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모델들이 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계보다 스폰서를 잡기 위해라는 다소 다른 견해를 보였다. 관계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오는 이들도 있지만 모델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을 지원해줄 이를 찾는 이들도 많다”며 “실제 성공 사례도 있어 (모델들이)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지고 이곳을 찾고 있지만 결국 되는 건 소수가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물론 이러한 아르바이트는 모델 생활에 치명적이다. 의류 피팅 모델을 하고 있는 박 아무개 씨(남·25)는 밤에는 바에서 낮에는 모델로 살아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행하다가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체중 조절을 위해 하루에 한 끼 식사를 하면서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긴 것.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박 씨는 “밤새 일하고 녹초가 되지만 오전에 일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며 고집을 피우고 있다. 또한 호스트바나 텐프로에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모델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박 씨는 “일단 돈이 필요하고 이렇게 해서라도 모델을 계속하고 싶은 게 우리들”이라고 말했다.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