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사인 전엔 ‘뒤집기’ 다반사
▲ 성유리 | ||
일각에서는 배우들의 출연 번복이 ‘몸값 올리기’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 출연이 불발된 경우 대개 제작사는 새로운 인물을 캐스팅해야 하는 문제로, 배우는 앞으로 캐스팅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부담감으로 골머리를 앓기 마련.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양쪽 모두 손해라는 얘기다. 일부 스타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출연을 번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당사자인 드라마 제작사와 스타 측의 입장을 들어봤다.
KBS에서 11월 방송할 예정인 드라마 <홍길동>의 두 주인공 주지훈과 조현재가 지난 8월 22일 돌연 출연을 취소해 구설수에 올랐다. <홍길동전>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코믹사극 <홍길동>에 출연하기로 했던 두 배우가 제작진과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하차의 뜻을 밝힌 것.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부 스타들이 무리하게 몸값을 올리려다가 제작진과 마찰을 빚은 결과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특히 주지훈은 제작진에게 회당 1000만 원이 넘는 톱스타급의 출연료를 요구,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출연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처음 구두로 계약할 때와는 다르게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사실이며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배우와 상의해 하차토록 한 것”이라며 “손해를 봤다기보다는 스타와 제작사 간 의견이 어긋난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주지훈 측과도 연결을 시도해봤지만 하차 이후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은 그는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스타들의 출연 번복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상당수 배우들이 출연과 번복을 반복하며 제작사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왔다. 어떤 이들은 출연 약속을 파기했다가 제작사와 방송사로부터 출연 정지 처분을 받거나 소송에 휘말리는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기도 했다.
최근 MBC 드라마 <9회말 2아웃>에서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치고 있는 이정진이 대표적인 예. 그는 드라마 <다모>의 출연을 기정사실화했다가 이를 번복해 방송사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당시 이정진은 ‘알레르기성 천식이 심해져 안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상대 배우와 마찰이 있어 출연을 취소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군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천식으로 4급 판정을 받은 후 오해는 풀렸지만 <다모>를 하차한 이후 그는 MBC 출연 정지 처분과 7300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 주지훈 | ||
물론 개중에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출연을 포기하는 스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가에서는 스타들이 출연 번복을 하는 것은 대체로 위상이나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일부 스타들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상당수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들은 “최근 톱스타를 데리고 있는 소속사의 입김이 세지면서 출연 조건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출연 번복 같은 일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두로 출연을 확실시했다가 촬영 날짜가 가까워지면 몸값을 올리는 등 계약 사항을 수정한다는 것이다. 계약서 작성을 앞두고 처음 약속했던 계약금의 두 배 가까운 금액에 1인 대기실, 최고급 식사 등 특별대우를 요청해 제작사와 마찰을 빚은 탤런트 A의 얘기는 방송가에서 유명한 일화다.
스타들이 드라마 제작에 지나치게 개입해 제작사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몇몇 스타들은 상대역으로 자신이 원하는 배우를 요구하거나 극중 비중을 늘려달라는 등의 억지를 부리며 제작진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몇몇 스타들은) 대본을 수정하거나 캐스팅에 관여하다가 만약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차하겠다고 얘기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반대로 제작사 측의 문제로 스타들이 작품을 하차하는 경우도 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경우 잦은 작가진 교체와 촬영 지연 등으로 몇몇 출연진들이 하차하는 일이 벌어졌다. 궁중 내관의 이야기를 그린 <왕과 나>는 10시간이 넘는 혹독한 대본 연습 때문에 일부 연기자들이 출연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게 제작사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배우들의 출연 번복 문제를 두고 한 방송사 드라마국 고위 관계자는 “‘스타’라는 우월의식의 영향이 크다”라고 해석했다. 마치 시상식장에 일찍 도착해 초반에 레드카펫을 밟으면 값이 떨어져 보인다고 생각하는 인식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
이 관계자는 “사실 배우들은 한 작품이라도 더 출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자꾸 튕겨야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며 “사실 배우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진 흥행성과 연기력에 좌우될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