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넘어 더 ‘큰 그림’ 그린다
남북 고위급 협상 타결을 계기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이미 대북사업 정상화에 대비한 작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희망하며 건물 안에 걸어놓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 사진. 이종현 기자, 임준선 기자
2008년 7월 11일 남한 관광객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관광이 중단된 지 7년째. 2010년 4월, 북한은 금강산지구 내 남한 측 시설 및 재산을 몰수하고 체류 인원을 전원 추방한 데 이어 2011년 4월에는 현대아산의 독점사업권을 취소했다. 또 그해 5월 ‘금강산국제관광특구법’을 채택해 남한 측의 금강산관광 참여를 배제하고, 2011년 11월 4일 중국을 통한 금강산국제관광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최대 위기 상황이 지속됐지만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시아버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숙원사업이자, 남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생애 마지막 역작이었다는 점을 현 회장은 결코 잊지 않았다. 지난 7년간 현대아산은 금강산관광사업 중단, 개성공단 사업 정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추진, 명맥을 이어왔다.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등 그룹 계열사들도 현대아산을 살리기 위해 고통을 분담해왔다.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에 올인한 상황이다. “무모한 도전이다”, “포기하면 더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현 회장은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 태스크포스 구성
현대아산이 오랜만에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다. 지난 8월 25일 새벽 남북 고위급 회담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다. 이날 남북은 추석 전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기로 합의했고, 주요 의제에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북측의 제안으로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도 언급했다. 전쟁 발발이라는 최대 위기가 해소되면서 찾아온 기회다.
“오랜 시간을 들여 합의점을 찾아낸 것에 대해 감사한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실무접촉도 무리 없이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산가족상봉 등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현대아산의 공식 입장이었다. 절제된 단어를 사용했지만 현 회장을 비롯한 현대그룹 임직원들이 느끼는 희망은 크다. 현대아산은 ‘화해무드가 형성되면’이라는 전제를 깔았으나 이미 태스크포스(TF) 등을 구성하고, 대북사업 정상화를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TF는 무엇보다 연내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정은 회장이 2009년 11월 18일 금강산관광 11주년 현지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일요신문 DB
사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좋아졌으나 현 회장은 대외적으로 코멘트를 삼가고 있다. 사내 임직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도 금강산보다는 당장 코앞에 닥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완벽한 준비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는 “일이 잘 풀릴수록 더 조심하고 꼼꼼히 챙겨야 한다. 현 회장도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것 같다. 작은 실수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예전보다 더 꼼꼼히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 ‘대북사업 선구자’ 상징성 회복 의지
현 회장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는 이유는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넘어 대북사업의 선구자로서 현대그룹이라는 상징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이미 많은 언론이 보도한 바대로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창업주와 아들의 숙원사업이다.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았던 대북사업에 뛰어든 현대그룹은, 이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리면서 제기된 숱한 오해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현 회장이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대북사업을 안착시키기 전에 과거 오해의 사실 여부를 따진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 회장이 생각하는 대북사업은 이제 가업의 승계 차원이 아니다. 기업가로서 모든 것을 걸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금강산, 개성공단을 넘어 더욱 더 다양한 분야로 협력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 타결은 이러한 꿈을 실현하는 데 이어 사실상 첫 발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나. 현재는 신중히 움직이고 있으나 상황이 더 나아지면 현 회장이 직접 나서 남북경협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범 현대가 결속력 강화에 기여할 듯
대북사업이 풀리면 범 현대가의 결속력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시 말해 정 씨 일가에서 외면당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던 현 회장의 존재감이 커진다는 것이다.
현대아산은 흩어지기 전의 범 현대가 계열 기업들이 십시일반 투자해 설립했다가 금강산 관광 사업이 중단되자 손실을 막기 위해 수년 전 손을 떼어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는데, 피보다 진한 돈 때문에 창업주의 숙원사업을 청산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업을 성공시키기 힘들다고 알려진 대북사업에 기약 없이 돈을 쏟아부을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점은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주의 숙원사업에 손사래를 치는 모습을,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이는 현 회장이 대북사업에 전념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기를 맞는다. 맏아들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이 집안을 맡고 있지만 그룹으로 볼 때 ‘사업’의 적통은 현 회장의 현대그룹이다. 연내 금강산 관광사업이 재개된다면 창업주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금강산 관광 재개를 시작으로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이 확대된다면 떠나갔던 범 현대가들도 다시 손을 잡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은 머릿속 구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경제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곳은 북한밖에 없다. 실패하면 또 다시 그룹이 무너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지만, 현 회장은 성공이라는 실낱 같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현대그룹 출신 고위 임원은 “이번 남북 고위급 협상 타결이 현대그룹에는 10년여 만에 온 가장 큰 기회다. 과거의 대북사업 성공 가능성이 2~3%였다면 지금은 5% 이상이다. 실패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만 성공 가능성이 증가한 것에 의미가 있다. 현 회장이나 현대그룹 임직원 모두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며, 반드시 하나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데 역점을 둘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정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