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짝사랑’… 때론 싸늘한 ‘역풍’으로
대기업 오너들이 비리 혐의로 검찰이나 법원에서 수사를 받거나 재판을 받을 때마다 드러나는 기업 홍보팀들의 과도한 ‘회장님 구하기’ 행태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일요신문DB
“토요일 저녁 (홍보팀이 모여) 다 같이 방송을 보면서 정말 ‘우린 죽었다’ 싶었죠. 취재진이 (골프장) 뒷문으로 몰래 들어올까봐 만약을 대비하고 있었던 건데 그걸 미행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다니 어디 말도 못하고 죽겠습니다. 언론에서 잘못된 걸 가지고 때리면 맞아야 되는 거라고들 하지만 정말 힘이 드네요.”
최근 한 공중파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오너와 관련해 각종 의혹이 제기된 대기업 홍보팀의 하소연이다. 해당 프로그램이 ‘악마의 편집’을 했다고 억울함을 토로한 홍보팀 관계자는 “방송에서 제기한 회장님 관련 의혹 대부분은 이미 검찰이 다 수사해서 무혐의 나온 내용들이다. 앞서 검찰 수사를 한 차례 받았던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우리 회장님 정말 그러실 분이 아닌데 전 정권하고 가깝다는 이유로 이번 정권에서 수사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솔직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근데 왜 하필 우리 회장님입니까. 검찰이라는 조직이 정치적인 거 아닙니까.”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한 대기업 홍보팀장의 항변이다. 회장 측근과 임원들이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이 잇따르면서 홍보팀 직원들에게 이번 추석은 연휴가 아닌 ‘비상대기’가 돼버렸다는 것.
대기업 홍보팀들이 ‘회장님 구하기’에 매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의 인사고과 평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홍보업무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판단할 객관적 수치는 희박하다. 그보다는 오너가 홍보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언론 관계자와 업계 평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대기업은 외부 평가보다 오너와 임원의 판단이 훨씬 중요할 때가 많다.
오너에 대한 의혹·비판 기사가 나오는 것은 홍보팀에 최악이다. 보통 실적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사는 “수치는 맞지만 해석이 다소 잘못된 것”이라고 보고하면 별 탈 없지만 오너에 대한 부정적 기사는 그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무조건 아프다. 기사 내용이 설사 거짓이고 다소 악의적이라고 해도 “왜 진작 기자에게 해명하지 않았느냐. 평소 기자들 관리를 얼마나 형편없게 했기에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느냐”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또 오너와 관련한 부정적 기사는 검찰 수사로 이어질 수 있어 홍보팀은 항상 서초동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검찰 수사를 받은 적이 있거나 수사 대상에 언급됐던 대기업들의 홍보팀은 더 긴장하게 마련이다. 검찰이 이른바 ‘첩보’라는 형식으로 각종 의혹과 풍문들을 캐비닛 안에 넣어두고 ‘언제 이 기업에 대한 수사를 해볼까’ 하며 저울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초동 대법원 청사. 일요신문 DB
그러다보니 위험한 선을 넘나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오너를 향한 잘못된 충성심의 발로다. 최근 대법원 판결을 받은 대기업 A 사의 홍보팀이 대표적.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홍보팀 인원을 대폭 늘린 것은 물론 심지어 서초동으로 출근하는 인원을 따로 조직했다. 이들은 검찰 수사 때는 검찰 인근 커피숍에, 법원 재판이 시작된 뒤에는 서울중앙지법 1층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기자들을 만나며 진행 상황을 확인한다.
기자들에게 도를 넘은 청탁도 서슴지 않는다. “재판이 어떻게 될 것 같나. 재판장이 뭐라고 말씀하셨나”라는 문의는 그나마 양반 수준이다. “재판을 맡은 재판장을 좀 아느냐. 우리는 만나주지 않으시더라. 자리 좀 마련해달라. 우리 회장님이 진짜 아프다. 우리 회장님이 아프다고 재판장께 말씀 좀 전해 달라. 정말 구속되시면 안 된다”는 등의 청탁을 들은 기자가 한둘이 아니다.
수사가 진행 중인 또 다른 기업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특히 대기업 B 사 홍보팀 직원들은 검찰 수사 상황을 실시간으로 그룹 윗선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검찰 고위 관계자는 “어떻게 B 사가 검찰 수사 정보를 그렇게 빨리 파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처럼 홍보팀 직원들의 회장님을 향한 ‘잘못된 짝사랑’은 주변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홍보팀은 “왜 하필 우리냐. 정치적인 배경이 뭐냐. 다른 곳도 다 하는 잘못인데 왜 우리만 수사하느냐. 검찰과 법원이 현실을 모르고 무리한 수사와 판단을 하고 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 일쑤다. “어떤 부분은 정말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홍보팀 직원은 아무도 없다.
특히 홍보팀들의 마지막 멘트는 짜놓은 듯 회장님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정말 만에 하나 우리 회장님이 그랬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도 회장님을 무겁게 처벌하면 안 됩니다. 회장님이 없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흔들립니다.”
‘기승전-우리 회장님’으로 마무리된다.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기업들은 국민의 여론을 예의주시하기 때문에 그나마 낫지만 B2B(기업 간 거래) 기업의 경우 홍보팀의 ‘순애보’는 눈물겹다.
회장이 회사 돈으로 카지노에서 보내준 VIP용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도박을 했던 C 사가 대표적이다. C 사 홍보팀은 “우리 회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기사에 나온 내용들은 잘 모르지만 우리 회장님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C 사 회장은 구속 수사만은 피하기 위해 100억 원이 넘는 피해금액을 급히 변제했지만 결국 구속된 채 재판을 받고 있다.
한 판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업을 대변하는 사람(홍보팀)들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책임을 얘기할 때는 ‘주주 자본주의’를 강조하곤 하죠. 배임이나 배임수재 범죄의 경우 더욱 그런데 주식회사라 제한된 책임을 진다고 해명하죠. 재판에서도 ‘이사회가 있지 않냐. 회장님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 급급하죠. 근데 자세히 보면 회장의 권한이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제왕적인 구조”라고 지적한다.
특히 회장이 구속된 경우 기업 홍보팀이 내놓은 입장을 보면 짜맞춘 듯 똑같다. ‘우리 회장님이 구속되다보니 투자에 관련된 주요 의사 결정이 이뤄질 수가 없어요. 회장님이 안(교도소)에 계시면 회사가 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많은 하청업체들도 힘들어지고 대한민국 경제에 큰 손해 아닙니까’라고 말이다. 국가 지원으로 성장한 대기업이 대부분임에도 ‘오너 일가의 능력으로 기업이 성장했다’고 설명하는 것도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다. 어떤 땐 협박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다 보니 대기업 홍보팀들의 ‘서초동 거주’는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회장이 구속됐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망할 것 같다고 협박하는 대기업은 망하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몇천억, 몇조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이 회장이 자리에 없다고 투자와 생산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 회사는 문을 닫는 게 맞지 않나. 그런 기업은 검찰 수사를 계기로 없어지는 게 오히려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기업 수사에 밝은 한 검사의 심경이다. 국민 여론도 비슷하다. 경제 성장률 2%대 초반의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기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과 같지 않아졌다. 10%대 성장을 거듭하던 때 ‘대기업 회장에게 약간의 개인 비리가 있어도 기업의 성장이 우리에게 혜택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했던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법조계 내부에서 ‘조현아 전 부사장 사건’은 실형을 선고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우세하다. 하지만 0.1% VVIP의 도를 넘은 행위에 국민들이 분노했고 여기에 홍보팀의 상식 밖 대응이 더해져 국민을 움직이게 했다.
이에 검찰은 구속영장 청구, 법원은 구속영장 발부와 1심 구속으로 성난 여론을 달랬다. 이제 국민들은 대기업 회장과 오너 일가 비리에 더 이상 관대하지 않다. 단순 절도범과 수십, 수백억 원을 빼돌린 대기업 회장의 처벌 수위를 비교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지적하는 국민이 많아졌다.
법조계에서는 “회장 비리에 따른 리스크가 왔을 때는 회피하기보다 정면으로 임해서 일부에 대해 처벌을 받는 게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변호사는 “검찰 수사와 구속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인정하고 뉘우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며 “땅콩회항 사건도 초반부터 무리하게 구속을 피하려 했다면 오히려 더 큰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 변호를 맡은 바 있는 한 변호사는 “회장 주위에서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측근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변호사는 “아무리 해도 구속이 불가피할 것 같은데 계속 구속되지 않도록 하라는 요구만 한다. 차라리 검찰 수사 때 구속됐다가 1심 재판 때 집행유예를 이끌어내는 게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는데 무조건 구속을 피하려고만 하니 검찰이 계속 다른 비리를 더 찾아내려고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남바다 언론인
로펌 신사업 ‘GRC 컨설팅’ 뜬다 ‘검찰 수사 피하는 법’ 자문 최근 로펌에서 각광받은 신사업 분야 중 하나가 준법훼손위험관리, 일명 ‘GRC 컨설팅’이다. GRC 컨설팅이란 기업지배구조(Governance)와 위기관리(Risk Management), 준법경영(Compliance)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기업의 소유와 지배를 어떻게 분리하고 각종 기업 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적 위기 등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등에 대해 자문해주는 것이다. 위험을 미리 차단하는 리스크 관리 분야로 기업이 처할 수 있는 법률적 위험 요인들을 사전에 진단하고 사전에 제작된 내부 통제 프로그램을 통해 이를 법률적으로 해결해준다. 보통 기업 수사는 내외부의 문제를 시작으로 몸통(회장)을 향해 가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고자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 GRC 컨설팅을 처음 도입한 곳은 지난 2005년 법무법인 화우다. 이후 김앤장과 태평양, 광장 등 대다수 대형 법무법인이 GRC마케팅 전담팀을 갖추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회사 간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정거래법 위반은 물론, 기업 내 부패 방지 관련 내부 규정 및 행동 강령도 정한다. GRC 업무는 애초 성격 자체가 검찰 수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니만큼 검찰 출신 변호사들, 특히 특수부 기업 수사 경험이 많은 검사들이 주로 담당한다. [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