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센 그녀’에 맞서 일단 합쳤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왼쪽)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9월 28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전격 회동한 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등 논의된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뿌리가 약한 당내 기반이 이들의 공조 행보 프로젝트에 한몫했다. 여권 신주류인 김 대표는 비박계로서 한계에 처한 상황이다. 김 대표는 지난해 10월 상하이 발 개헌 정국에서 청와대 반격에 꼬리를 내리며 ‘로우키(low-key)’ 전략을 구사했다. 그 이후 한껏 몸 낮추기로 청와대 비위 맞추기에 들어갔다.
문 대표 사정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내 비노계 비토로 ‘문재인 체제’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허약한 체제가 노출되는 계기일 뿐이다. 원인은 따로 있다. 비노계 반격에 쉽게 흔들리는 호남의 약한 고리, 허약한 리더십이 원인이다. 대권을 노리고 있는 문 대표로선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인 셈이다.
이들의 전략적 제휴 가능성은 문재인 체제가 출범한 새정치연합의 지난 2·8 전국대의원대회 직후 꾸준히 흘러나왔다. 여권 실세에 전방위로 포위당한 김 대표와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논란에 휩싸인 문 대표가 정치적 변곡점마다 사실상의 연대 전선을 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둘은 경남중학교 선후배(김 대표가 1년 선배) 사이이기도 하다. 지역은 부산이다. 대선 승리 방정식에 한층 다가선 이른바 ‘뜨는 해’다. 여권은 역대 대선에서 영남 후보가 대선 종착지에 다다랐다. 박 대통령을 비롯해 박정희·노태우·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대구·경북(TK) 출신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산·경남(PK) 출신이다.
비영남 출신 이회창 전 총재(충청권)는 1997년·2002년(새누리당 후보)과 2007년(무소속) 대선에서 연거푸 낙마했다. 2002년 대선 땐 부산의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노풍’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영남에서 여권 갈라치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권의 대선 승리 방정식이 ‘영남 분열-비 영남 포위’인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른바 ‘9·28 합의’를 꾀한 둘의 연대 작전은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김 대표와 문 대표는 추석 연휴 기간인 9월 28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오전 11시부터 12시 40분까지 100분간 단독 회동했다. 이날 회동은 김학용 새누리당 대표 비서실장과 최재성 총무본부장 라인이 가동하면서 전격 성사됐다. 두 대표 대다수 측근조차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둘은 이 자리에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의견 접근을 이뤘다. 안심번호는 정당이 여론조사를 할 때 이동통신사업자가 임의의 전화번호를 제공하는 제도다. 휴대전화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사전에 차단해 역선택과 동원 등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다만 이들은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 선거구획정, 농어촌 지역구 조정 등 여타 선거구제 개편에 대해선 합의하지 못했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하나만 건진 회동에 그쳤지만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추석 연휴 직후인 같은 달 30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 앞서 이들이 공천 룰에 전격 합의하자, 여야 내부에선 “김무성과 문재인의 합작품”이란 평가가 나왔다.
친박계의 ‘제3의 길 모색’ 주장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김 대표는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판을 깔았다. 비록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의 논의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명칭 변경’ 등 제도운용의 묘에 따라 취지만은 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무성·문재인의 부산 합의’가 궁지에 몰린 김 대표에게 퇴로를 열어준 셈이다.
앞서 취임 1주년 때인 지난 7월 14일 김 대표의 오픈프라이머리 승부수로 ‘선점 효과’를 잃은 문 대표는 공천 룰 전쟁의 안에 들어서게 됐다. ‘친박계 vs 비박계’ 대결로 압축된 공천 룰 전쟁에 문 대표가 가세하면서 단번에 ‘청와대 vs 국회’ 구도의 판을 만들어버렸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들의 회동 시점과 지역 등을 눈여겨보라”고 말했다.
추석 연휴의 전격 회동은 밥상머리 이슈를 주도했다. 그것도 이들의 지역구이자 박 대통령 지지기반인 부산에서 만났다. 공천 룰 구도가 ‘친박 vs 여야’로 바뀔 가능성이 한층 커지게 된 것이다. 반 오픈프라이머리나 전략공천 등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낙하산 공천’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선 룰 정국이 ‘구태정치 vs 공천개혁’ 프레임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 ‘현재권력 vs 미래권력’, ‘지는 해 vs 뜨는 해’ 구도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반 박근혜’ 프레임은 적중했다. 박 대통령이 제7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마치고 귀국한 30일 공천 룰 전면전은 시작됐다. 앞서 김 대표가 29일 소집한 긴급 최고위원회의에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비롯해 범 친박계인 김태호·이인제 최고위원 등이 사실상 ‘보이콧’한 데 이어 이날 의총에서 김 대표가 “당 대표 모욕은 오늘까지만 참겠다”며 청와대에 경고장을 던지며 한때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당 내 특위에서 모든 안을 논의하기로 했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는 분석이 많다. 친박과의 갈등이 도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부당한 선거개입”이라며 총선 룰 공세의 칼날을 청와대에 정조준했을 뿐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와 관련해선 비노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모습이다. 이종걸 원내대표와 박지원 의원은 “모바일 투표”라며 반발한 반면, 문병호 의원 등은 “부산 회동은 졸속 협상”이라고 평가 절하하면서도 제도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새정치 내부에선 총선 룰 정국을 ‘유승민 찍어내기’ 파동 때와 마찬가지로 ‘청와대 vs 국회’로 해야 한다는 기류가 적지 않았다. 범 친노 관계자는 “당분간 ‘협력적 경쟁관계’ 체제를 유지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는 기존의 여론조사 방법에 비해선 조직 동원 방식 등의 인위적인 왜곡 조작 가능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며 “문 대표가 결정한 이 사안이 당내 다수 의견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다른 관계자는 “박근혜는 갇혔다”며 “두 대표의 부산 회동은 박 대통령의 양다리 스텝을 더욱 꼬이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