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보다 혼으로 어필한 ‘로맨틱가이’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리처드 기어는 그야말로 완벽한 ‘지덕체 교육’의 산물이었다. 어린 시절 그를 사로잡은 건 음악이었다. 틴에이저 때 이미 수많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그는 작곡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철학을 전공했고, 이후 연기에 뜻을 품고 뮤지컬 무대에 선다. 29세 되던 1978년엔 티벳에서 1년을 지내며 불교에 심취했다.
리처드 기어라는 배우에게서 단순히 육체의 냄새만이 나지 않는 건, 그의 내면이 이처럼 긴 세월 동안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섹스 신은 격렬한 몸의 움직임보다는 어떤 ‘느낌’을 통해 오르가슴과 엑스터시를 전한다. 경력 초기부터 스타가 된 이후까지, 그는 꼼꼼히 작품을 골랐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1977) <아메리칸 지골로>(1980) <사관과 신사>(1982) <브레드레스>(1983) 등은 에로티시즘이 아닌 그 ‘의미’로 화제가 된 작품들이었다(대신 그는 <다이 하드>(1988) 같은 영화는 거절했다). 미국의 도덕률이 붕괴되고 레이건의 보수주의 정권이 시작되던 시기, 리처드 기어는 상징적 존재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실베스터 스탤론, 아널드 슈워제네거 등의 마초들의 기세가 등등하던 시기에, 리처드 기어는 여성들을 유혹하고 혹은 위로했다. 그는 방황하는 여인의 말동무가 되어주고(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상원의원의 아내에게 기꺼이 지골로가 되며(아메리칸 지골로), 공장 노동자의 신분 상승 로맨스를 완성시킨다(사관과 신사). 이러한 이미지는 <귀여운 여인>(1990)으로 이어져, ‘매춘부에게 프러포즈하는 백만장자’라는 극도의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리처드 기어를 스타로 만든 영화는 1980년대 초반의 <아메리칸 지골로> <사관과 신사>였다. 아르마니 스타일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이른바 ‘지골로 룩’을 탄생시켰던 그는, 이 영화에서 미국 상업영화로는 드물게 성기를 정면으로 노출하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에게 단숨에 ‘매력 있고 섹시한 남자’를 의미하는 ‘헝크’(hunk) 이미지를 안겨주었고, 1980년대 중반까지 그는 이 안에 갇혀 있었다.
<사관과 신사>에서 데브라 윙거와 함께했던 섹스 신은, 에로 팬들에겐 아직까지 회자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기어는 상대 여배우를 능숙하게 리드하며, 단지 몸으로 덤벼드는 섹스 신이 아닌, 서로에 대한 진한 육체적 갈구를 연기한다. 이 장면에서 기어는 매우 섬세한 몸 연기를 통해 리얼하면서도 절대로 외설적이지 않은 섹스를 보여준다. <브레드레스>는 그의 싱싱한 육체적 매력을 극단적으로 어필한 작품.
하지만 당대의 섹시 스타 킴 베이싱어와 만난 <노 머시>(1986)는 엄청난 기대를 모았으나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고, 이후 기어는 ‘에로계’와 인연을 끊고 새로운 연기 세계를 개척한다.
이후 리처드 기어는 쫙 빠진 수트나 편안한 니트로 옷을 갈아 입고, 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의 매력적인 남성이 된다. 평생 갈 것 같았던 헝크 이미지를 그토록 빨리 없앨 수 있었던 건, 그의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증명하는 사실. <유혹은 밤 그림자처럼>(1990) <미스터 존스>(1993) <프라이멀 피어>(1996) 같은 성인용 R등급 영화에도 종종 등장했지만, 더 이상 그는 몸으로 어필하지 않았고 고도의 심리적 연기를 선보였다. 흥미로운 영화는 다이앤 레인과 부부 연기를 펼쳤던 <언페이스풀>(2002). 젊은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리처드 기어는 이 영화에서, 어느 젊은 녀석에게 매력적인 중년의 아내를 빼앗기는 무능한 중년남이 된다.
어느덧 환갑이 넘은 나이의 리처드 기어. 이젠 더 이상 옛날처럼 격정에 들뜨고 바지만 입은 채 거리를 질주할 순 없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는 섹시하다. 특유의 눈웃음은 더욱 깊어졌고, 트레이드마크인 은발 머리는 나이와 함께 점점 더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고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