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서의 그분을 모신 건 행운”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는 상주 김현철 씨. 사진공동취재단
상도동에 겨울이 오는 것이 내겐 두려웠다. 생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는 단단했으나 폐렴은 지독하게 그를 괴롭혔고, 함께 얻은 합병증도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다. 당신이 그토록 즐기시던 조깅도 할 수 없었고, 식사도 거동도 불편했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정치지도자인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행운이었다. 정치적 파고에 휩쓸려 함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보람된 날이 더 많았다. 돌이켜보면 당신은 국민들에게 참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얻은 미움도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갔다”는 말처럼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아버지께서는 약속을 지켜나갔다. 당신은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특히 1995년 3월 8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이 전격 교체된 것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김진영 당시 육참총장은 영내에서 사열을 받던 중 갑작스럽게 옷을 벗었을 정도였다. 함께 경질된 서완수 기무사령관 역시 오전에 월례회의를 주재해 훈시까지 했던 터였다. 두 장군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일격을 당했고, 국민 위에 군림하던 수많은 별이 우수수 떨어졌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도 생생하다. 그해 겨울 인수위가 있던 효자동은 활기가 참 넘쳤다. 문민정부가 만들어갈 청사진들이 하나둘 내걸리기 시작했고,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효자 프로젝트’였다.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개방, 경복궁 내 30경비단 이전, 궁정동 안가 철거와 같은 아이디어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국민들에게 친숙한 정부, 그리고 권위적이지 않은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그전까지는 없던 일들이었다.
당시 인수위 행정실장을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가 맡았다. 아버지께서는 그를 무척 아꼈고,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에도 입성시켰다. 김 대표를 두고 “똘똘하고 기업가 자제라 돈 욕심이 없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김 대표는 종종 잊은 것 같기도 하다. 정권에 굳건히 맞서 당당하게 권력을 쟁취해냈던 과거들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께서는 투철한 실천가였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 자진해 재산을 공개하는 솔선수범도 마다치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지 100평의 상도동 자택이 재산의 전부다. 가족으로선 원망스럽기도 했다. 퇴임 이후 형편이 좋지 못했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주변에서 믿지 않았으나 해외여행 한 번 나가기가 버거웠다. 우리 쪽에서 먼저 체재비가 나오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당신이 최소한의 품위유지도 되지 않는 상황이 절망스러웠다.
1996년은 아버지께서 먹을 갈아 종이에 ‘역사바로세우기’라며 거침없이 써내려간 기억이 생생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 물결은 그해 12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 특별법) 제정으로 완성됐다. 당신은 일제 강점기부터 제5공화국, 군사독재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결별을 꾀하고자 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버지를 통해 역사란 정권의 입맛에 따라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배웠다. 조선총독부 철거를 반대하고 5·16을 혁명이라고 하는 세력들이 바로 교과서 국정화의 주역들이라니 통탄할 일이다. 이승만은 독재하다가 미국으로 쫓겨나 결국 거기에서 생을 마감했고 박정희는 종신을 꿈꾸다 결국 부하의 총에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은 결코 숨길 수 없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며 민주화 투쟁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켜온 상도동계 인사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럼에도 아버지께서는 상도동계 인사들이 정치권 전반에 활약하는 모습에 흡족해하셨다. 선거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인사들에게 격려와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들은 쉽게 떠나고 또 쉽게 변했다. 아버지 역시 완벽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된 관습을 청산하고자 했던 것만큼은 제대로 평가되고, 또 정치인들이 이어가기를 바란다.
내년 봄 상도동에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는 기념도서관이 들어선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하신 채 눈을 감으신 것이 원통하다. 아버지께서 떠난 상도동엔 어김없이 봄이 오겠으나 예년과는 다른 모습이리라.
김임수 객원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