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보호 요청 그날, 경찰과 ‘일대백’ 대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4일 조계사 관음전을 격려 방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비롯한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지도부와 창문 틈으로 잠시 대화를 나눈 뒤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4·24총파업대회’와 ‘2015 세계노동절대회’ 등의 도심 집회를 주도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체포영장이 청구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4차례에 걸쳐 기소된 사건 재판에 불출석하자 검찰은 지난달 11일 구속영장까지 발부했다.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이 모두 발부된 한 위원장은 지난달 14일 민중총궐기 긴급기자회견이 열린 프레스센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에 배치된 경찰 70여 명이 4개월간 민주노총 위원장 집무실에서 도피생활을 해왔던 한 위원장에 대해 검거 작전을 펼쳤으나 민주노총 회원들과의 충돌로 검거에 실패했다. 당시 경찰은 프레스센터 로비까지 진입했으나 한 위원장이 18층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로 대피하자 5분 만에 철수했다. 이후 한 위원장은 서울시청광장에 마련된 11·14 전국노동자대회 연단에 올라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이겨낼 수 없다”면서 “서울의 모든 거리를 점령하고 거리를 나가 시민을 만나고, 기어이 불의한 정권의 심장부 청와대로 진격하라”고 2차 궐기대회에 대한 강한 투쟁 의지를 밝혔다.
한 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위원장 서신을 통해 “지금은 조계사에서 다시금 공개적으로 조합원 동지들을 만나고자 한다”면서 “아쉽게도 총궐기 이후 현장에서 직접 조합원 여러분을 만나겠다는 계획은 잠시 접을 수밖에 없지만 총파업 투쟁 승리를 염원하는 조합원 동지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전했다.
4개월 동안 민주노총 위원장 집무실에서 도피생활을 해온 한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로 은신처를 옮긴 것이다. 이에 앞서 지난달 16일 민주노총은 “한 위원장이 15일 밤 10시 30분께 조계사로 피신해 조계사 측에 한 위원장에 대한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날 경찰은 한 위원장 검거 경찰관에 대한 특진을 내걸었으며 서울 남대문경찰서의 검거전담반에 30명을 추가 편성 조치했다.
한 위원장은 도심포교100주년기념관(관음전이 있는 건물) 4층 외국인 전용 템플스테이에서 지내왔다. 사찰안내소 직원은 “한 위원장이 은거 중인 곳은 본래 외국인 전용 템플스테이인데 요즘에는 스님들의 숙소로 쓰여왔다”고 설명했다. 해당 직원은 “템플스테이가 유료로 이용되는 곳이긴 하나 한 위원장은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변보호를 요청해왔다”면서 “조계사가 한 위원장의 편의를 봐줘 비용이 따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며 식사는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세용 종무실장은 “도심포교100주년기념관에 몰래 숨어들어온 한 위원장이 자정 무렵 한 스님에게 발각됐다”면서 “한 위원장과 조계사 사이 사전 협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일 조계사 앞에서 경찰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 고성준 인턴기자
지난달 17일 대한민국어버이이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조계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계사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쫓아내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 위원장의 퇴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날 밤 서울종로경찰서는 기동대 1개 부대 80여 명의 경찰과 수사요원 40여 명을 배치해 조계사를 에워쌌다. 한 위원장의 도피를 대비해 관내 출입 차량 통제도 이뤄졌다.
이튿날인 지난달 18일 오전 8시 한 위원장은 조계사 부주지 담화 스님과 면담을 갖고 공식 신변보호 요청서를 제출했다. 또 시국 문제에 대한 중재를 화쟁위원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담화 스님 및 총무원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사전 양해 없이 조계사로 들어오게 된 점을 정중하게 사과드린다”며 “항상 사회적 약자 문제에 고민하면서 앞장서 오고 있는 조계종 화쟁위원회에 중재와 큰 도움을 요청 드린다”는 말을 전했다.
면담이 이뤄질 당시 경찰은 12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3교대로 조계사 주변을 봉쇄했다. 조계사 측에서 한 위원장의 신변보호 요청을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 검거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조계사 측은 종단 내부의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조계사의 한 관계자는 “한 위원장이 육체적·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다”면서도 “이번 사안은 철도노조 파업 때와 다르게 과격 시위가 동반된 측면이 있어 종단 내에서 한 위원장이 나가야 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총무원장인 자승 스님이 해외 일정으로 오는 주말에야 귀국할 예정이라 종단 차원의 입장 발표 등은 어려움이 있으나 일단 한 위원장을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어제 밤부터 주지스님 주재로 수차례 회의를 열어 상황을 숙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19일 오전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된 범법자를 보호하는 인상을 국민에게 줘서는 크게 대접을 받지 못할 것”고 발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도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조계사가 치외법권 지역인가. 왜 이런 일만 생기면 그런 데에 가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범법을 비호하는 것처럼, 비호하는 대상이 되는 것처럼 종교가 이용돼서는 절대 안 된다. 빨리 나와서 자수를 하든가, 자수할 생각이 없으면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검거해야 한다”며 조계사와 한 위원장을 비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계종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한 위원장의 조계사 내 진입에 대해 종단과 조계사 대중들은 매우 고심하며 신중히 판단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집권 여당의 대표를 지낸 원로 정치인이 종교 내부의 문제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서 의원에게 사과를 요청했다. 대변인은 또 “종교인들을 폄훼하고 나아가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한 것은 종교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는 것”이라며 “국가와 정치권력이 종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조계사 부주지인 담화 스님이 국회를 찾아가 서 의원에게 즉각 사과를 받았으나, 김 의원은 사과 대신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고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종교가 범법자를 두둔하는 결과를 가져와선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제하의 글을 올렸다.
같은 날 조계사 화쟁위원회는 한 위원장의 거취 및 중재 요청 건에 대해 논의한 직후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화쟁위원회 위원장인 도법 스님은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며 “부처님은 고통 받는 중생을 끌어안는 것이 붓다의 존재 이유라고 하셨다”고 중재 요청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한 위원장이 조계사에 들어온 것과 관련해 사회적으로 찬반논란이 있다.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는 의견, 종교단체로서의 자비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모두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면서 조심스런 입장을 표명했다.
지난달 21일 조계사 주지스님인 자승 스님이 인도네시아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경찰과 민주노총 측은 한 위원장의 거취 문제가 결정지어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조계종 총무원 청사에서 열린 정례회의에서 한 위원장의 거취에 대한 보고를 받은 자승 스님은 “조계사와 신도회, 화쟁위원회가 국민과 불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잘 대처하라”고 전했다.
지난달 25일 화쟁위원회는 경찰청 강신명 청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튿날 경찰 측은 한 위원장에 대해 ‘화쟁의 대상이 아니라’며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한 위원장의 거취 문제가 화쟁위원회와 신도회의 결정에 달린 가운데 지난달 30일 비로소 마찰이 발생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경 신도회 관계자가 한 위원장을 찾아가 “조계사에 들어온 이후 신도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면서 “내일 오전 12시까지 경찰에 자진 출두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신도회 박준 부회장은 “(한 위원장이) 5일만 시간을 달라며 (조계사 퇴거를) 거부했다”며 “그를 강제로 끌고 나오려고 몸싸움을 벌이다 (한 위원장의) 옷이 다 찢어졌고 결국 실패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난 3일 보수단체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한상균 위원장을 쫓아내라” 구호를 외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래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전국플랜트건설노조원들이 ‘압수수색 규탄 및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투쟁 결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성준 인턴기자
이튿날인 지난 1일, 신도회원 1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도회 임시비상총회가 열렸다. 총회 안건은 한 위원장의 조계사 은거 및 퇴거 요구였다. 총회가 끝난 직후 이 종무실장은 “좀 더 인내하고 참고 견디자는 신도들의 의견이 대다수였다”면서 “6일까지 (한 위원장의) 은거를 허락하며 당장 퇴거를 요구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조계사 은거 16일 만인 1일 모습을 드러냈다. 머물고 있던 도심포교100주년기념관 4층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비친 한 위원장은 “잘 견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겠다”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를 위한 행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민주노총 관계자는 “투쟁”을 외치며 한 위원장을 응원하기도 했다.
한 위원장이 창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방은 409호실이다. 하지만 실제 숙박하는 방은 407호실이나 410호실이라는 게 경찰 및 조계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조계사 현장에 투입된 종로경찰서의 한 형사는 “409호실은 한 위원장이 아닌 다른 스님이 숙박하는 방”이라면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409호실 창문을 통해 모습을 비추고 있으나 실제 숙박하는 방은 410호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심포교100주년기념관 1층에 위치한 신도들이 이용하는 식당인 ‘승소’의 직원은 “4층에 가보니 한 위원장이 주기적으로 방을 옮겨가며 생활하고 있더라”면서 “최근에 머무는 방은 407호실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전했다.
한 위원장은 신도회의 퇴거 요청에 이틀간 단식투쟁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도회가 임시비상총회를 갖고 한 위원장의 퇴거 요청에 대한 입장을 바꾸자 한 위원장도 단식투쟁을 종결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조계사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에서 전달한 외부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한 위원장이 12월 1일 이후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경찰 및 취재진의 감시가 강화됨에 따라 외부음식 반입에 제한이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음전 자원봉사자도 “매일 자원봉사자가 바뀌긴 하나 오늘 하루 내내 외부음식이 반입되지 않았다”면서 “식사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전했다. 이 종무실장은 “승소나 만발(스님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공양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전했다. 반면 다른 조계사 관계자는 “외부음식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승소에서 공양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지난 5일 서울 도심에서 2차 민중총궐기 및 국민대행진을 강행했다. 이 자리에는 5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으며, 경찰병력도 1만 5000여 명이 투입됐다. 경찰은 불법 시위를 대비해 차벽을 설치하고 살수차를 대기시켰으나 우려했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아 평화시위가 보장됐다. 앞서 경찰은 한 위원장이 조계사에서 도주한 후 민중총궐기 대회 현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으나, 한 위원장은 영상인사를 통해 “지금은 공안정국이다. 큰 민중의 항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은 총 파업으로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신도회가 한 위원장의 퇴거 기한을 지난 6일로 정한 가운데 한 위원장이 자진 출두하지 않아(오후 7시 현재) 조계사에는 하루 종일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경찰은 조계사 일대에 전날 대비 700여 명의 경찰 병력을 추가 투입해 경계근무를 강화했다.
유시혁 기자 evernuri@ilyo.co.kr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