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0일 미국과의 경기에서 오른쪽 눈 위가 찢어진 황선홍(오른쪽)이 김현철 주치의(가운데)에게 응급조치 를 받고 있다. 특별취재단 | ||
주치의는 현장에서의 응급한 조치 뿐 아니라 대표팀과 함께하는 의료팀을 이끌고 훈련과 휴식중에도 선수들의 건강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는 일을 맡고 있다. 감독만큼이나 바쁜 일정을 소화해온 김 박사로부터 월드컵 기간 대표팀의 건강관리와 부상관리에 얽힌 숨막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본다.
4강에 오르기까지 한국팀은 지칠줄 모르는 정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반이나 연장전으로 갈수록 지쳐가는 상대 팀과는 대조적으로 초반과 똑같은 체력을 유지해 상대적으로 ‘뛸수록 강해지는 이상한 팀’으로 보였다.
그 비밀은 뭘까. 우선 히딩크 감독이 훈련 후반부에 집중 실시한 ‘파워프로그램’의 덕이 크다. 히딩크 감독은 숙련된 그의 스태프들과 함께 과학적으로 프로그래밍된 파워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의 체력 강화훈련을 실시했다.
김 박사는 이 훈련의 특징이 ‘인터벌 훈련’에 있다고 설명했다. 전력질주하는 중간에 잠깐씩 리커버리타임을 둠으로써 순식간에 피로가 회복될 수 있도록 몸을 적응시키는 것. 이 때문에 전후반 90분을 뛰어도 한꺼번에 지치지 않고 고른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훈련의 강도로만 따지면 종전에 하던 주먹구구식의 훈련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예컨대 무작정 운동장 20바퀴를 뛰는 데 소모되는 칼로리가 더 많다. 그러나 파워프로그램은 이보다 적은 힘을 들이고도 더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어 ‘과학적 훈련’과 체력관리의 중요성을 실감케 했다.
과학적 훈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선수들의 힘을 북돋우는 데는 우리나라의 전통 보양식들도 큰 몫을 했다. 선수 개개인들이 중요한 게임이 있을 때마다 나름의 보약을 한 가지씩 먹기도 했지만 선수단 앞으로 공식 후원되는 건강식품들이 많았다. 공식 접수된 것만 3억7천만원어치나 됐다. 들어오는 보약이라고 무조건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 기증되는 보약은 먼저 샘플을 가져와 엄밀히 심사한 다음 접수 여부가 결정되었다.
김현철 박사가 밝힌 보약 허가 원칙 세 가지. 첫째 상업적 목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불가하다. 둘째 규정된 도핑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약효가 학술논문으로 게재돼 인정을 받은 것이어야 한다. 재료를 알 수 없는 것까지 수십 종의 보약이 선수단에게 기증되었지만 사전 심의를 거쳐 선수단에 제공된 것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심의는 엄격했다. 국가기관인 농업진흥청에서 공급한 동충하초조차 정확히 약효를 입증할 만한 학술논문이 없어 선수들이 복용하지 않았다.
선수단을 통해 공식 제공되는 건강식품 외에 선수들 개인이 예전부터 스스로 효과를 본 전통 보양식을 계속 먹는 것은 도핑테스트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금지되지 않았다. “개소주 개구리탕 심지어는 ‘공진단’이라는 한 알에 50만원을 호가하는 보약을 복용하는 선수도 있었다. S선수는 특히 뱀탕이 잘 맞는 듯했다.”
과학적 체력관리에는 종종 산소호흡기가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에게는 산소호흡기 효과를 기대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김 박사는 “업체에서 호흡기 2대를 제공받아서 몇 번 사용해봤지만 효과를 얻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별로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 김현철 박사는 코뼈가 부러진 김태영이 계속 경 기에 나간 것은 사실상 ‘도박’이었다고 털어놨 다. 당시 김태영의 역할이 중요했던 터라 도저 히 뺄 수가 없었다고. | ||
─주치의로서 크게 보람을 느낀 순간이 있다면.
▲지난해 5월 이민성 선수가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다. 그대로라면 대표팀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히딩크 감독도 구체적으로 고민을 할 정도였다. 왼쪽 발목 인대가 심하게 늘어나 다른 때 같으면 수술을 해야 하겠지만 수술을 하면 장기간 훈련에 참여할 수 없게 되므로 그것은 대표팀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수술하지 않고 인대 강화훈련으로 회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 스페인 전지훈련을 앞두고는 완벽할 정도로 발목이 회복됐다. 원래 이민성 선수가 느긋한 성격이지만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또 본선 폴란드와의 첫 경기가 끝났을 때 황선홍 선수는 왼쪽 무릎과 엉덩이 근육을 심하게 다쳐 다리조차 들지 못할 정도여서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의 물리치료 등으로 놀랍게 상태가 회복돼 다음 경기에 나갈 수 있었다.
또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을 앞둔 날은 한밤중에 이천수가 심한 복통을 일으켜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급히 달려가 먹은 것을 억지로 토하게 하고 수면제까지 먹여 잠을 재웠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응급조치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 이천수는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에 들어갈 수 있었고, 경기에서 멋진 첫 골을 터뜨렸다. 그런 선수들을 볼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
─아쉬운 기억으로 남는 선수도 있을 텐데.
▲이동국 선수가 너무 안됐다(한숨). 그는 경쟁에서 졌다기보다는 한국 축구의 취약점 때문에 희생됐다고 할 수 있다. 본 대회를 앞두고 평가전을 연속해 치르는 동안 이동국은 중요한 선수였기 때문에 매 경기 계속 출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발목에 있던 인대 부상이 점점 악화된 것이다.
그는 키 스피드 다리 근력 몸싸움 전혀 뒤지는 것이 없다. 슈팅파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왼쪽 발의 부담 때문에 언제나 한 템포 늦게 움직였고 이것이 수비 가담률에서 평가절하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은 그의 부상사실을 몰랐다.
이 상태로 군대를 가게 된다면 이동국은 앞으로의 선수생활도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가 치료와 재활훈련을 제대로 받게 된다면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상을 극복하려고 얼굴살이 빠질 정도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의 투지에 불타는 눈빛이 선하다.
─안타까운 순간은.
▲ 이탈리아전에서 김태영 선수가 코에 부상을 당했을 때 그가 “코뼈 부러졌죠”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괜찮아 일어나”라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에게는 뼈가 부러졌으나 뛸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로서는 도박이었다. 나가서 만일 또 같은 데를 다치게 되면 코뼈가 내려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영은 수비라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고, 순간 전체전술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히딩크 감독도 어쩔 수 없는 순간에는 특정한 선수에게 진통제를 투여해서라도 계속 투입시킬 수 없겠는가 부탁하기도 한다. 부상을 당했지만 키 플레이어를 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스태프의 한 사람으로서 히딩크 감독에 대한 느낌은.
▲히딩크 감독은 한마디로 ‘좋은 선수를 보는 눈’을 가졌다. 히딩크가 적용했던 훈련은 알다시피 이미 유럽에서는 일반화된 훈련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시스템을 잘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히딩크는 국내 축구 사정과 타협할 필요가 없었다. 선수들도 축구 외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홍명보 선수는 “이제껏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항상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선수들의 몸상태는 어떤가.
▲현재로서는 차두리와 송종국의 몸 상태가 대표팀에서 가장 완벽하다. 그 외에 해외에 나갈 계획을 하고 있는 선수들은 2개월 정도 쉬며 반드시 부상체크를 먼저 해야 한다.
김 박사는 우리 월드컵 대표팀에게 적용됐던 훈련프로그램을 전국의 유소년 팀들이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충고를 했다. “앞으로 축구계의 화두는 유소년 축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법은 희망적이지 않다. 학부모들의 태도가 문제다. 어린 나이에 강도 높은 훈련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차범근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대표팀 감독을 한 사람인데도 하루에 두 시간만 훈련하고 나머지 시간은 축구를 즐길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믿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성적 위주로 가르치지 않는 감독은 무능한 감독이라고 본다.
그 결과 치열한 경쟁에 아이들 몸이 고장나기 시작한다. 지금 대표팀 선수들도 모두 어딘가 고장나 있는 상태다. 또 10년 이상 축구를 하면서 자란 국내 프로선수들 가운데 제대로 된 의료기록을 갖고 있는 선수가 거의 없다. 부상 시기와 병력을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결국 손해는 선수 자신에게 돌아간다”.
김 박사는 오는 9월 아시안게임에서 주치의를 맡을 생각은 아직 없다고 한다. 하지만 2006년 월드컵이라면, 또 대표팀을 국내 감독이 맡는 체제라면 다시 한번 주치의의 임무에 봉사할 생각이 있다고. 히딩크 감독이 이뤘던 것을 우리의 힘으로 다시 한번 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힘을 보태고 싶기 때문이다. 7개월 동안 가족을 세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그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며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