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14일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박지성(맨 왼쪽)이 환호하고 있다. 특별취재단 | ||
세계인들은 또 한국의 독특하고 열정적인 응원에 매료되었다. 한국 축구가 이룬 21세기 첫 월드컵의 신화 속에는 붉은 티셔츠 한 장으로 무장한 4천7백만 응원군이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각인되었다. 그들은 열광적이면서도 차분했다. 세계인의 뇌리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인상깊게 알린 한국 축구의 신화창조 과정을 따라가 보자.
6월4일. 결전의 날은 밝았다. 히딩크 감독은 이때 한국팀의 전력이 ‘존(ZONE)’에 근접한 상태라고 말했다. 존이란 선수들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상승세를 타는 시점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염원하던 1승 앞에서는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오후 8시30분.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의 모든 것에 대비한 듯 보였다. 시종 우세한 경기였다. 고공패스를 완전히 차단한 대표팀은 황선홍의 수면을 가볍게 가르는 듯한 발리슛과 유상철의 파워 중거리 슛으로 역사적인 1승을 올렸다.
‘이 여세를 몰아 바로 미국까지 잡고 16강에 진출하자’ 출전사상 첫승을 거둔 한국인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첫 경기에서 승점 3을 기록한 한국이 10일 대구에서 있을 미국전에서도 승리를 거둔다면 16강 진출은 사실상 확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북중미 골드컵에서 미리 접전을 경험할 때는 미국팀에 유럽진출 멤버들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 포르투갈전을 보기 전까지는 미국팀의 전력을 100% 알 수가 없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탓인지 10일 대구 경기장의 경기는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미국팀은 거칠게 우리의 골문을 몰아붙였고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수비수의 머리에 부딪혀 이마가 찢어졌다. 황선홍이 치료를 받으러 잠깐 나간 사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미국이 선제골을 넣었다.
이후 후반 안정환이 투입돼 천금 같은 헤딩슛을 성공시킬 때까지 대표팀도 응원단도 초조하며 지루한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지고 나면 D조에서 가장 강한 팀으로 여겨지는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선수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다행히도 막판에 동점골이 터져 무승부를 건져냈지만 히딩크 감독은 이례적으로 불쾌한 심경을 드러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는 것이다. 찬스를 살리지 못한 골 결정력 부족에 다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병사들을 보호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다. 이날 경기 초반 PK를 실축한 이을용에 대한 불만이 기자들의 질문에서도 불거졌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키커는 자신이 지정한 것이라면서 “또 PK 기회가 나도 키커는 이을용이다”라고 말했다. 히딩크는 어쩔수 없는 실수에 대해서는 절대 비난을 하지 않는 선수들의 보호자였다.
미국전이 무승부로 끝난 후 포르투갈전은 16강 진출의 최대 고비였다. 포르투갈을 이겨 자력진출이 되지 않을 경우, 폴란드가 미국을 잡아줘야 16강 진출이 가능하다. 포르투갈은 미국전에는 패했지만 폴란드를 4-0으로 이겨 ‘호랑이가 정신차린 형국’이었다. 포르투갈도 이번 게임을 이기지 않으면 16강 진출이 힘든 상황이어서 박빙의 승부가 예견됐다.
경기를 앞두고 신문마다 방송마다 질 경우, 이길 경우, 비길 경우 등등 ‘경우의 수’를 머릿기사로 올렸다. 그러나 히딩크는 자신은 ‘경우의 수’에는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이기는 경기를 할 뿐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 히딩크 | ||
같은 시간에 벌어지고 있는 미국-폴란드전에서는 뜻밖에도 폴란드가 미국을 2-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조 예선 1승이라도 건져 체면을 지켜야 했던 폴란드팀의 화이팅은 경기 시작과 동시에 2골을 뽑아내는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제 한국은 설사 포르투갈에 지더라도 1점 정도 차이라면 16강에 문제가 없는 여유있는 상황이었다.
“비기기만 해도 된다.” 포르투갈은 필사의 승부를 걸어왔다. 그러나 미국전에서 발목을 접질려 휴식하는 이틀 동안이나 목발을 짚고 다니던 박지성이 막판에 그림 같은 슛으로 포르투갈의 마지막 기대를 허물었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황선홍은 “이제 여한이 없다”며 감동을 감추지 않았다.
16강 진출. 이것은 우리의 꿈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음을 알리는 승리였다. 최상의 컨디션을 보여준 김남일 송종국 황선홍 등이 실은 그날 아침까지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했다.
꿈은 이루어졌지만 국민들의 열망은 식지 않았다. 내친 김에 8강도 가자’는 구호가 요란했고 선수들도 이런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히딩크 감독도 “우리는 8강 이상을 준비해 왔다”며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이길 준비가 돼있다는 말로 선수들의 전의를 북돋웠다.
4일 뒤인 18일 이탈리아전은 우리 대표팀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는 초유의 승부이자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16강 진출의 꿈을 일궈낸 우리 팀이 다시 8강에 도전하는 날. 광화문과 서울 요지에는 무려 4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응원단은 ‘붉은악마’라는 조직된 응원단의 숫자를 몇배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조직되지 않은 붉은 응원단은 그러나 일사불란했다. 외신들은 ‘열광적인 12번째 선수’가 한국팀이 지닌 또 하나의 무기라고 소개했다.
초반 5분 설기현이 얻어낸 천금같은 PK를 한국이 자랑하는 스타 안정환이 실축해 무위로 돌려버리자 대한민국 전역이 한숨소리로 가득 찼다. 포르투갈전에서 이을용의 실축과 함께 대표팀의 놀라운 저력을 잠시 의심케 하는 장면이었다.
한국팀은 주춤거리기 시작했고 비에리의 헤딩골로 분위기는 더욱 침체되어만 갔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노련하고도 숙달된 반칙 플레이는 우리 선수들로 하여금 포르투갈전에서처럼 선수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슛을 날리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했다. 후반에 다소 살아나는 듯했으나 아직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선수들을 멀티 플레이어로 훈련시킨 히딩크 감독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총공격. 한국 수비의 핵심 홍명보까지 빼내고 황선홍과 이천수를 투입했다. 공세가 강화된 틈을 타서 설기현이 드디어 일을 냈다.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의 드라마가 연출되고 게임은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차두리까지 가세한 5명의 공격 편대가 이탈리아 골문을 쉴새 없이 위협했다. 안정환의 헤딩 골이 터졌다. 턱까지 차오른 긴장감과 초반 페널티킥 실축에 따른 부담이 일시에 풀려버린 안정환은 탈진한 듯 그라운드에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탈리아는 ‘축구 변방국’에게 당한 역습이 믿기지 않는 듯 신경질을 내며 경기장을 떠났다. 공항에서는 욕설을 퍼붓고 떠났으며 귀국해서도 자신들의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심판이 불공정했다고 유치한 공세를 폈다. 이탈리아 전국이 나서서 신성한 경기를 ‘사기극’으로 매도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언론들과 세계적인 권위지 프랑스의 <르 몽드> 등은 이탈리아의 이런 행동이 어느 대회에서나 반복된 악습이라고 지적하면서 한국팀은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훌륭한 경기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그날만큼은 히딩크도 ‘축구 변방의 40위 나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이미 세계 수준의 팀”이라며 인터뷰 내내 자신감에 찬 미소를 보냈다. “한국팀은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다”라는 말로 다음 상대를 향해 위협의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지난 22일 한국-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 홍명 보가 골을 성공시키고 있다. 이 골로 스페인은 짐을 쌌고 한국은 4강신화를 창조했다. | ||
대부분의 나라들이 보따리를 싸고 귀국한 가운데서도 한국은 살아남았다. 과연 한국은 4강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 4강이란 이미 우승권이나 다름없는 범위이기에 한국의 신화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지는 세계의 관심사였다. 더구나 한국은 폴란드로부터 시작해서 포르투갈 이탈리아까지, 이 대회의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유럽의 전통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쳐왔다. 8강에서 맞붙을 스페인도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6월22일 광주.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몸소 응원을 위해 찾아왔다. 거리응원 인파의 수도 늘었다. 시청앞과 광화문 네거리의 인파는 이미 87년 6월 민주화항쟁 때의 인원을 넘어섰고 전국 각지의 공설운동장이나 공원, 강변 둔치 등에 모니터를 설치하고 단체로 거리 응원에 나선 인원은 이미 4백만 이상을 헤아렸다. 첫손에 꼽히는 재벌그룹의 총수들도 그들의 응원단과 함께 빨간 티셔츠를 입고 시청앞 광장에서 구호를 외쳤다.
스페인은 초반 공세에서 예상대로 날카로운 전진 패스를 시도했다. 전반과 후반 스페인의 우세였다. 차례로 유럽 강호들을 꺾는 동안 몸이 지칠대로 지친 대표팀은 단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듯했다. 연장전 9분께 모리엔테스의 슛이 허술해진 한국 골문 앞에서 작열했다. “끝났구나”하는 위기감이 스쳐갔지만 천운이었을까. 볼은 다행히도 왼쪽 골 포스트를 맞고 튀어나갔다. 그것은 우리 팀의 승리를 예감케 했다.
승부차기. 한국팀은 첫 승리를 쟁취한 이후 같은 대회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기록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황선홍의 첫 킥이 카시야스에게 걸릴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을 빼면 우리 선수들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이운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멈칫거린 스페인의 네번째 키커 호아킨의 실축을 잡아냈다. 거리는 밤새 축포와 환호하는 시민들로 넘쳐났다.
이탈리아 스페인 두 거물을 쓰러트린 한국팀의 승리는 일부 유럽언론들이 제기하는 심판의 편파판정 의혹에 시달려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진정한 강대국이라면 패배의 원인을 거울을 보며 생각하라”는 점잖은 말로 일축했다.
한국은 세계의 축구사를 거듭 고쳐쓰고 있었다. ‘한국-이탈리아’ 등으로 표기하던 TV중계 스코어 자막은 ‘대한민국-스페인’으로 바뀌었고, 열광하는 붉은 응원단을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조차 자신도 모르게 “대~한민국”을 중얼거리고 다녔다. 더 이상 감동이 증가한다면 한국은 폭발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정말 믿기지 않는 결승전 진출을 앞둔 독일과의 한판 승부. 그러나 선수들은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전문가들도 완전환 피로회복은 힘들다며 ‘믿을 것은 정신력뿐’이라는 말로 아쉬움을 대신했다. 독일의 신예 발락의 골로 요코하마행은 무산되었다. 태극전사들의 피로 누적이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경기장을 가득메운 붉은 관객들은 마치 한 편의 감동적인 영화가 끝난 뒤에 그러하듯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곤 이내 정신을 차려 태극전사들을 기립박수로 격려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히딩크 감독도 남모르게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밀려오는 고독감 때문인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인터뷰 지역에 모습을 나타낸 그는 “우리선수들이 자랑스럽고 성원해준 국민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언론담당관 얀이 말했다. “선수들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준 히딩크를 이제 이방인이 아닌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경기장 밖 어느곳에서나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인파들. 지고도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비록 요코하마행은 좌절됐지만 태극전사들이 국민 앞에 크게 새겨놓은 두 글자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