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루과이(위), 폴란드(아래) | ||
각 팀이 한국에 도착할 때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이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지낸 사람들이 있다. 통역부터 길 안내, 협회와의 스케줄 조정 등 각 팀의 촉수와 손발이 되어 움직였던 한국인 ‘연락관’들이다. 각국 팀과 ‘한솥밥’을 먹으며 영광과 좌절의 순간까지 함께 했던 이들 연락관들을 통해 이방인들이 한국에 머문 기간의 ‘체류기’를 들어보았다.
●우루과이
“우루과이팀을 다시 맡으라면 절대 사양하겠다.” 우루과이팀 연락관 박현선씨는 이렇게 운을 뗐다. “우루과이 대사부터 축구협회 관계자들까지 시간 관념도 철저하지 않고 모든 일에 체계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연락관을 아랫사람 부리듯 했다”며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승후보로까지 꼽히던 우루과이팀의 2무1패 경기내용은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연락관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연습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이들이 훈련하는 시간은 거의 하루 한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레코바나 실바 같은 스타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1인1실을 따로 쓰는 등 선수들 사이에도 거리감이 있었다.
박현선씨는 “출발할 때 시간을 어겨 이튿날 비행기를 다시 예약해 출국했는데 7백60만원의 일부항공료를 지불하지 않았고 25일 현재까지도 입금이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폴란드팀 연락관 김영훈씨는 폴란드 팀을 한마디로 ‘친구 같은 팀’이라고 평했다. “엥겔 감독은 동네 아저씨 같은 친근감으로 편하게 일할 수 있었고 스트라이커 크리샤워비치는 호탕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고 평했다. “폴란드축구협회 회장부터 모든 임원들과 거의 반말을 할 정도로 친했다”는 것. 그만큼 폴란드팀이 선전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도 크다고 했다.
폴란드 선수들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과 첫 경기를 치르러 가는 폴란드팀 버스를 향해 박수쳐주는 시민들을 보고 ‘유럽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남성에게 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과 ‘간통죄’에 대해 흥미를 나타내면서 ‘한국 여성의 지위’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대구에서 백화점에 갔을 때는 점원이 많은 데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대전에서 미국전을 갖기 전날은 선수 전원이 동학사를 방문, 주지 스님의 승리기원 기도를 받고 고마워했다. 김영훈씨는 “폴란드 팀은 한국인의 친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고마워 했다”고 말했다.
폴란드 선수들은 실점을 많이해 기분이 좋지 않았을 텐데도 사인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팬들이 기념촬영을 요청하면 일부러 무릎을 구부려 키를 맞춰주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고.
김 연락관은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 골키퍼 두덱을 꼽았다. 폴란드 선수들도 한국인들처럼 ‘한턱 문화’에 익숙한데 주로 두덱과 같은 고액 연봉자들이 통크게 쏘는 모습을 자주 볼수 있었다고.
폴란드 팀이 가장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철통같은 경비와 과잉친절이었다. 박씨는 “자기네들이 왜 그런 삼엄한 경비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위부터 브라질,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 ||
연락관 한충선씨는 브라질팀을 “남미의 여유로움과 축구왕국의 자존심을 고루 갖춘 팀이다”며 수행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고 밝혔다.
브라질 선수들은 스스로를 ‘11개의 별’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히바우두가 이번 월드컵에서 사상 처음 시뮬레이션으로 인한 벌금을 부과받는 상황에서도 분위기는 그리 침체되지 않았고 믿었던대로 호나우두가 게임에서 부활해줘 시종일관 잔칫집 분위기였다”고.
이들의 낙천적인 기질은 버스안에 항상 비치된 작은북을 보면 알수 있었다. 버스를 타면 항상 작은북을 두드리며 한 선수가 노래를 선창하고 다들 따라불렀다.
한씨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스콜라리 감독. “스콜라리 감독은 축구협회 회장과 콤비를 이뤄 내 뒤에 앉아 항상 장난을 걸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감독이 출국인사로 던진 말 “내가 가면 장난칠 사람 없어서 심심할거야.”
브라질 선수들은 한국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시간이 부족해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한차례 방문해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월드컵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에 더 후한 점수를 주며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해주기도 했다.
●슬로베니아
참가국 가운데 가장 언론의 관심 밖에 있던 팀중 하나가 슬로베니아. 연락관 박형건씨는 “임원들이 꼼꼼하고 책임감이 있어 대체로 일하기가 편했다”며 “선수들도 대부분 튀는 사람이 없고 운동선수 특유의 순박함이 돋보이는 팀이었다”고 회상했다. 슬로베니아는 이번이 첫 출전이라서 3패의 성적에도 그리 낙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슬로베니아 선수들이 특히 좋아했던 것은 한국산 휴대폰. 너무 작고 앙증맞다며 ‘슬로베니아에서도 작동이 되느냐’는 질문이 쇄도했다.
수행중 무척 당황했던 일이 두번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에게 진 날 저녁 선수들이 일찍 잠이 들었는데 실수로 화재경보 벨이 울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것과 공항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일.
“도핑데스트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 공항에 일찍 도착했는데 이를 연락받지 못한 경찰라인이 아직 진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감독이 직접 선수들에게 경찰라인을 뚫으라고 지시, 그걸 막느라고 진땀뺐다”며 아찔한 순간이 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일본경기를 마치고 14일 한국에 도착한 이탈리아팀은 처음부터 한국을 무시하는 분위기였다고 이탈리아 팀을 맡았던 서의석씨는 ‘이탈리아 사태’를 처음부터 예견이라도 한듯 말했다.
심지어 출국때는 이탈리아축구협회 회장이 연락관 서씨에게 의례적인 인사말마저 생략한 채 “혹시 한국이 FIFA 심판을 매수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나”고 물어봐 패전의 변명거리 찾기에 급급한 인상을 남겼다. 서씨는 이탈리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관중의 열기와 ‘again 1966’이란 카드섹션에 기분 나빠한 것도 있지만 입국할 때부터 사사건건 일본과 비교해가며 한국을 헐뜯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한국이 일본만큼 자신들을 스타로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는 듯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선수들의 짐을 날라주는 사람도 여기보다 많았다’는 불평도 있었다. 마중나온 두명의 통역관으로 불만이었는지 자국 대사관에 연락해 통역자 추가 지원을 요청, 다른 대표팀에 비해 자만심이 강하고 매우 민감한 팀이었다고.
한국과의 경기가 끝난 직후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펑펑 울면서 나올줄을 몰랐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안정환이란 이름을 생소해했고 그런 선수에게 패했다는 것이 분했을 것”이라고 서씨는 말했다.
이탈리아 임원 중 한사람은 휴대폰으로 고국에 전화를 걸면서 ‘한국은 저주스러운 나라’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일부 신문은 흥분한 이탈리아 선수가 FIFA 관계자를 갈기고 싶었다고 한 말을 보도하기도 했다. 서씨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원래 쇼맨십이 강하다. 그냥 위협하는 제스쳐이지, 안전요원도 있는 상태여서 실제 그럴만한 배짱은 없었을 것이다”고 해석했다.
▲ 중국(위), 파라과이(아래) | ||
밀루티노비치 감독에게도, 중국에게도 이번 월드컵은 시기상조였다. 자신의 실험이 실패한 것이 아쉬웠는지 밀루티노비치 감독은 최근 감독직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차범근 감독이 중국에 있을 때 통역을 맡았던 조선족 김청일씨가 중국팀 연락관이었다.
“하오하이둥이나 좀 이름있는 선수는 ‘다음엔 유고출신 감독은 안된다’고 비꼴 정도로 팀내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중국은 이번은 본선 진출에 큰 의미를 두고 있고 이미 2006년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팀은 한국처럼 팀내 위계질서가 강하지는 않다. 다만 워낙 나라가 크니까 출신지별로 선수끼리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고.
기억에 남는 선수는 마밍위. “마밍위는 클론을 정말 좋아했다. 경기전 파이팅을 다지면서 클론의 음악을 듣고, 이번 방한에도 그의 개인적인 큰 목적은 클론의 시디를 몽땅 사가는 일이었다.”
●파라과이
파라과이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감독과 선수들의 호흡이 잘 맞지 않은 것이 패전의 원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인 말디니가 감독으로 영입된 것은 지난 1월. 감독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파라과이 연락관 신승호씨는 “칠라베르트의 감독대행설이 나왔으나 팀 선수들은 감독을 존경하고 있었다. 다만 경기 스타일이 파라과이인들과 잘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곁에서 본 파라과이팀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파라과이팀은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팀으로 알려져 있다. 16강 진출에 실패하고도 부산 해운대에서 시민들과 5대5 축구를 즐겼을 정도다. 신씨는 “‘미소년’ 산타쿠르스가 연봉을 제일 많이 받는 선수 중 하나지만 팀의 막내로서 궂은 일을 다하는 것이 인상깊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다 인상깊은 선수는 칠라베르트라는 선수의 존재이다. “칠라베르트는 첫 인상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처음에 공항에서 문제가 생기자 우리를 닥달하던 그 표정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로 남은 것도 역시 칠라베르트다.
신씨는 스페인전이 끝나고 맥주를 한잔하며 칠라베르트의 인간적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칠라베르트는 신씨에게 “당신이 이렇게 나랑 술을 먹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라며 “내가 워낙 인상이 안 좋아서 사람들이 잘 오해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의 부진에 대해서도 “내가 골을 많이 먹어도 우린 16강에 진출했고 게임을 즐겼다”며 남미인 특유의 여유를 보였다고.
칠라베르트도 자국에서 히딩크만큼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출마설’을 언급하면서 “나는 부와 명예를 축구에서 얻었기 때문에 정치할 생각은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프랑스리그에서 뛰고 있는 칠라베르트는 일본리그로 옮겨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