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10일 벌어졌던 서울월드컵경기장 개 장기념 한국-크로아티아전에서의 히딩크 감독. 그때 그는 4강에 진출해 다시 이곳에 올 것이라 생각했을까. 이날 경기는 2-1로 한국이 승리했다. | ||
2000년 11월11일, 눈앞에 다가온 월드컵에 대비해 발족된 기술위원회에서 이회택 감독이 내뱉은 탄식이었다. 월드컵 주최국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세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만큼 한국 축구계의 현실은 혼란스러웠다.
그로부터 20개월. 한국 축구팀은 이런 혼돈의 시간이 과연 있었는가 싶게 달라진 모습으로 세계 축구계의 선두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과연 그 20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한국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네덜란드인 히딩크 감독이 처음 한국팀 감독 제의를 고사하고 그 다음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 한 말은 옳았다. 그가 네덜란드 팀을 이끌고 98프랑스월드컵에서 마주쳤을 때 ‘약체긴 하지만 무언가 두려운 힘을 가진’ 팀이었다는 기억밖에 없는 한국팀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이 선수들이 참가하는 모든 경기를 직접 보는 수밖에 없었다.
2001년 1월 한국팀 감독이 되어 서울에 온 히딩크는 처음 석 달 정도의 시간을 주로 한국팀을 파악하는 데 쏟았다. 국내 프로축구 경기를 관전하고 프로팀 감독들과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으며 안정환 설기현 등 유럽에 진출해 있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각 리그의 경기를 관전하러 다녔다. 그러나 석 달간의 관찰을 통해 히딩크는 이렇게 진단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낮은 수준이다.”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1월)과 카이로에서 열린 두바이 4개국대회에서 한국팀은 유럽팀에 약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체감도 없었고, 투지도 엿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축구계나 언론은 베스트 11을 빨리 확정해 본격 훈련에 나서라고 추궁을 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베스트 11의 선발을 서두르지 않았다.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필요에 따라 많은 선수들을 차출했고 또 돌려보냈다. 언제까지 탐색만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후에 히딩크는 말했다. 자기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쟁심리가 필요했다고.
히딩크는 대표팀 선수들의 생활을 통제했다. 훈련중에는 복장을 통일하게 하고, 식사시간도 정확히 지키도록 요구했다. 팀의 기강을 잡는 것과 동시에 감독으로서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한국 선수들은 낯선 외국인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지시를 따랐다.
▲ “생각보다 낮은 수준이다.” 한국대표팀 감독 직을 수락한 히딩크가 석 달 동안 한국팀 분석 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그는 대표팀을 그의 계획대로 만들어나갔다. | ||
“고참은 고참끼리 어린 선수들은 어린 선수들끼리 식사를 하더라. 밥 먹는 동안 아무런 대화도 없이 묵묵히 밥만 먹는 것도 특이했다. 이런 분위기는 선수들 사이에 교감을 나누는데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식탁을 바꾸면서 선수들 사이에는 다양한 교감이 오가기 시작했다. 선배 후배에서 형 동생 사이처럼 거리가 좁혀졌고 이해심이 높아지는 만큼 경기중에 호흡도 척척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기까지 히딩크는 23명의 엔트리를 확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대표팀에서 뛰어온 선수들의 역량을 재확인하는 한편 부족한 부분은 국내 리그를 관전하다 발견한 선수들을 불러들여 채워넣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서정원 강철 하석주 윤정환 등 90년대를 풍미하던 한국팀의 간판스타들이 팀을 떠나고, 송종국 이천수 최태욱 김남일 등 20대 초반의 ‘젊은 피’들이 대거 팀에 수혈됐다.
그후 4월과 5월 이집트 4개국대회와 컨페더레이션스컵을 포함해 2001년과 2002년 5월까지 한국팀이 치른 A매치(공인 국제경기)는 무려 32게임이나 됐다. 그때마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다시 평가하고 다시 채워넣으며 최상의 진용을 짜는 데 집중했다. 사실 중반까지의 A매치 전적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특히 월드컵의 터줏대감 유럽팀의 높은 벽은 넘질 못했다.
고비는 곧 찾아왔다.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이 밝아오자 히딩크사단, 한국의 전사들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미국에서 열린 북중미 골드컵에 출전했다. 미국에게 1-2패, 쿠바와 멕시코에 0-0무승부, 코스타리카에 1-3패, 캐나다에 1-2패. 다섯달 뒤 월드컵에서 첫 16강 진입을 노리는 주최국의 앞날에 분명 적신호였다.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외국인 감독은 역시 한국팀을 이해할 수 없다. 몸값이 비쌌다. 아직 주전도 확정이 안됐으니 제대로 준비를 하기는 하는 건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등등. 선수들도 전문가들의 이런 걱정에 조금씩 동요되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히딩크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월드컵 16강이 목표며, 조금도 차질없이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 지난 4일 폴란드전에서 첫골을 넣은 뒤 기뻐하는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 ||
일견 한가해보이는 기초훈련이라 일부 여론의 질타가 극심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어떤 경기 어떤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한국팀의 독특한 체력이 히딩크의 과학적인 파워프로그램의 결과라는 것은 이제 충분히 입증돼 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히딩크가 한국팀에 접목시킨 유럽형 일자수비가 우리 수비진에게 서서히 체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팀이 압박수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되자 게임메이커와 킬러의 양성이 새로운 과제로 대두됐다.
히딩크는 설기현을 강력한 킬러 후보로 점찍었으며 황선홍의 파트너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이때도 안정환은 여전히 감독의 관심 밖의 인물로 보였다.
안정환에게는 그가 세리에A의 빅리거라는 자부심보다는 팀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뛸 준비가 돼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더 필요했다. 이미 유럽까지 가서 안정환의 플레이를 지켜본 히딩크 감독은 안정환을 벼랑끝까지 내몰아 그가 마침내 거친 야성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런 냉정함은 히딩크가 지닌 노련한 용병술의 중요한 단면이었다. 많은 선수들이 자신이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감독은 그 누구에게도 주전이라는 확신을 주지 않았다.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를 통해 세계 정상의 골키퍼로 불리게 된 이운재는 폴란드와 본선 첫 게임에 출전한 순간까지도 자신이 주전이 되었는지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2월 들어 우루과이와의 친선경기에 다시 패전하면서 경험 많은 선수들을 기용해야 한다는 요구도 높아졌다. 8개월만에 복귀한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 홍명보를 받아들인 히딩크는 마지막 전지훈련인 스페인 라망가 캠프에서 그동안 제외되었던 안정환를 불러들였다. 유럽 3인방 설기현 심재원 안정환의 기량을 마지막으로 테스트할 기회였고 이에 따라 히딩크 감독도 소속팀에 선수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더욱 잦아졌다.
3월20일. 한국팀은 월드컵에서 처음 만나게 될 폴란드전의 전초전이라고 할만한 핀란드전에서 황선홍이 2골을 몰아 넣으며 무실점 승리를 거두었다. 유럽팀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팀은 경기 전적에서도 눈에 띄게 탄력을 받고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설익었지만 1월부터 시작해온 파워프로그램이 결실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무렵 대표팀의 23명 엔트리의 윤곽은 조금씩 드러나는 듯했지만 히딩크 감독은 아직도 경쟁중이라고만 말했다. 그에게는 언제나 긴장을 풀지 않고 경쟁하는 선수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터키 코스타리카 중국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와의 잇따른 친선경기에서 한국팀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이기거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히딩크 사단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지성 설기현 김남일 송종국의 활약이 안정된 틀을 잡아나갔다.
국민의 신뢰와 기대도 함께 커져갔다. 선수들 사이에도 ‘이제는 나의 기술이 통한다’‘뭔가 된다’는 자신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5월26일 세계 랭킹 1위인 프랑스팀과의 경기도 모처럼 2-3으로 패하긴 했지만 이것은 유쾌한 패배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본선경기. 한국 선수들의 가슴은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6월4일 오후 8시. 빨간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은 폴란드로부터 역사적인 월드컵 첫승을 거머쥐게 될 부산아시아드 메인스타디움에 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