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명보 | ||
16강 진출의 대업을 달성한 주인공들, 태극전사 당사자들의 밤도 그랬다. 맥주를 마셨다는 사람, 가족 친구들과 축하전화를 주고 받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돼 아침부터 일어나 신문을 찾았다는 사람.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이튿날인 15일 아침까지도 여전히 들떠 있었다.
‘행운의 땅’‘기회의 땅’인천에서 한국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성적표를 받아든 대표팀 선수 5인방에게 진짜 궁금했던 내용들을 직접 물어봤다.
[홍명보]
― 어제 몇 시에 잤나.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수들과 얘기 나누고 계속 축구 경기 보다가 새벽 4시경에 잠든 것 같다.
― 우리가 16강에 진출하리라고 예상 했었는지.
▲이렇게까지 좋은 성적을 거둘 줄은 몰랐다. 16강이란 목표를 이루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아직 경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 이전에 참가했던 월드컵과 비교해서 한국팀의 현재 실력을 평가한다면.
▲대표팀의 실력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체력이 나빠서 성적이 안 좋았던 것도 아니다. 단 경기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무작정 롱킥을 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패스 연결이나 공수폭이 좁아진 부분 등 보다 세련된 축구를 구사하는 능력이 생겼다. 물론 히딩크 감독의 역량도 있겠지만 우리 선수들의 잠재된 능력을 무시할 수 없다.
― 히딩크 감독과 함께 하는 대표팀 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무엇이었나.
▲엔트리 선발 과정과 선수를 탈락시키는 과정에 의문점이 있었다. 물론 감독의 전권이지만 동양적인 정서를 무시하는 선발 방법들이 아쉬움을 갖게 했다.
― 2002월드컵이 개인의 축구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 같나.
▲월드컵 출전의 마지막을 가장 화려하게 보낸 순간으로 기억하고 싶다.
― 홍명보의 저력을 말한다면.
▲내 이름, 내 얼굴, 내 명성에 대한 ‘자존심’이다.
▲ 이운재(왼쪽), 이영표 | ||
― 3경기에서 단 1점만 내줘 예선에 참가한 32개팀 골키퍼 가운데 공동 1위에 올랐다. 이같은 선방의 비결이 무엇인가.
▲흥분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부분 중요한 게임에서 이성을 잃으면 실점을 많이 하게 마련이다. 그래도 어제처럼 16강 진출이 확정된 순간에는 정말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지난 10일 미국과의 경기에서 황선홍이 부상당한 틈에 한 골을 먹었는데,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는지.
▲골키퍼라고 모든 공을 다 막을 수는 없다. 단 다음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실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국전에서 선취골을 먹고 순간적으로 당황은 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무지 애썼다.
― 김병지와의 치열한 주전 경쟁에서 일단 이긴 셈인데, 소감은.
▲월드컵 개막 전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선택은 감독의 몫이기 때문에 그저 결과를 기다릴 뿐이었다. 월드컵이 전부가 아니라 대회가 끝나도 계속 축구를 할 것이므로 감독의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병지 형이 실력이 떨어져서 내가 뽑힌 게 아니다. 단지 감독 스타일에 내가 좀 더 맞았을 뿐이다. 나라고 항상 주전만 하겠는가. 언젠가는 골대 앞이 아닌 벤치에 앉게될 지도 모른다.
― 한국팀의 16강 진출을 어느 정도 예상했나.
▲우리 팀이 좋은 성적을 낼 거라고 믿었다. 지난 18개월 동안 힘든 훈련을 열심히 해냈고 팀워크도 상당히 좋았다.
― 가장 고마운 사람은.
▲잘 참고 기다려준 아내다. 6월13일이 결혼기념일이라 아내에게 선물로 16강 진출 소식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이 열기가 월드컵 때만 아니라 프로축구에 대한 사랑으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영표]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약자를 통해서 강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 승리 소감을 표현한 이영표는 다음날 전화통화에서 ‘간증’을 하겠다며 먼저 재기 스토리를 꺼냈다.
“지난 1일 훈련 도중 왼발 장딴지 근육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한 이영표는 의사로부터 전치 6주의 판정을 받았고 아무리 빨라도 3주는 지나야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결국 월드컵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진데 지난 1년6개월동안 오로지 월드컵만을 위해 노력했고 기도했던 일이 너무나 아쉽기만 했다. 슬픔과 탄식에 빠져 있는 것도 잠깐, 쉽게 포기할 수 없어 기도에 매달렸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듯이 월드컵에서 하느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해달라.’ 새벽부터 밤까지 기도를 했다. 그 기도 덕분인지 부상은 의외로 쉽게 가라앉았고 포르투갈전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
기도의 결과로 좋은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믿는 이영표는 시종일관 깊은 신앙심을 발휘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 훈련중에 차두리 선수와 부딪혀 다치게 됐는데 원망스럽지는 않았나.
▲전혀 아니다. 훈련하다 보면 부상도 당할 수 있는 법이다. 내 부주의로 인해 다친 것이지 누구 잘못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두리에 대한 감정은 전혀 없다.
― 첫 게임인 폴란드전을 숙소에서 지켜볼 때의 심정은.
▲처음엔 2-0이란 결과에 뛸 듯이 기뻤지만 아쉬움도 컸다. 길고 긴 시간 월드컵을 준비했는데 막판에 부상으로 선수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 대표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
▲프랑스, 체코와의 경기에서 0-5로 진 뒤 쏟아진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감내하기가 힘들었다. 선수들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데 언론에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 히딩크 감독을 만나기 전과 후의 차이점이 있다면.
▲경기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하는지 경기 컨트롤과 밸런스를 유지하는 테크닉을 배웠다.
― 이번 월드컵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유럽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즉 어떤 벽을 깨고 나온 것이다. 예전엔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했지만 이젠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해야 할 차례다.
▲ 황선홍(왼쪽), 김남일 | ||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마지막 경기가 될지 아니면 다음 경기가 또 이어질지 황선홍은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여러 생각들로 불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국전에서 뜻하지 않는 부상으로 인해 엄청난 골수팬들을 확보하게 됐지만 그 장면을 보고 눈물 흘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재방송에서 보고 가슴이 저렸다고 한다. 축구사랑, 가족사랑, 팬사랑이 남다른 황선홍은 한층 밝은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했다.
― 기분이 어떤가.
▲정말 좋다. 포르투갈전이 마지막 경기가 아니어서 더욱 기쁘다. 언론에선 포르투갈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는데 난 오히려 해볼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비디오를 분석해봤을 때 미국보다 단점이 많은 팀이었다. 그래서 자신 있었다.
― 대표팀 은퇴 선언을 월드컵 개막 직전에 한 이유는.
▲오래 고민한 끝에 한 것이다. 하지만 파장이 그렇게까지 커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좋은 모습으로 물러나고 싶었고 월드컵 끝난 뒤 보다 시작 전에 발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 16강에서 맞붙는 이탈리아전에 대한 전망은.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잘 참고 이겨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지더라도 한점 후회하지 않을 경기를 펼치겠다. 홈 그라운드고 선수들의 컨디션이 최상이라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 이러다가 우승까지 가는 것 아닌가.
▲(웃으며) 우승하면 더 좋겠죠.
[김남일]
안정환이 이미 유명한 ‘전국구 스타’라면 김남일은 새로 탄생한 ‘오빠부대’의 우상이다. 이천수와 막강 라이벌을 이루며 여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김남일은 뛰어난 언변과 재치있는 화술로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 월드컵 대회를 ‘평가전’같이 치르고 있다는 김남일의 16강 진출 막후 고백.
― 포르투갈전 초반과 후반의 분위기가 아주 달랐는데.
▲초반엔 긴장이 됐다. 20분 정도 지나면서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특히 포르투갈 선수가 첫 퇴장 당하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 외국팀 감독과 선수들이 김남일의 플레이에 대해 칭찬하는 목소리가 크다.
▲일단 몸싸움에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가 플레이에 나타나는 것 같다. 그동안 터프한 경기를 많이 한 덕에 유럽의 장신들을 상대해도 크게 위축되지 않고 자신감이 더욱 커진다.
― 가장 좋아하는 선수를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내가 정말 그랬나. 어제 경기 후로 마음을 바꿨다.
― 한때 직업이 웨이터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
▲더이상 과거는 묻지 마세요.
― 16강전에 임하는 각오는?
▲지금까지는 포르투갈 밖에 생각을 안해서 미처 생각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