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 배역 따내자마자 미제 사건 주인공으로
1970년대 TV시리즈에 두루 등장했던 바바라 콜비는 연인과 함께 흑인 남자들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1939년 뉴욕에서 태어나 뉴올리언스에서 성장한 바바라 콜비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며 연기에 관심을 가졌고, 동부 명문대 중 하나인 바드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엔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느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학업을 마친 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시작한 그녀는 25세 되던 1964년 루이지 피란델로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서의 연기가 호평을 받으며 브로드웨이로 진출했고 곧 각광 받게 된다. 입센의 <인형의 집>을 비롯해 다양한 스타일의 연극 무대에 선 그녀는 1966년 <줄리어스 시저>의 포르티아 역으로 연극계의 스타덤에 올랐다.
큰 키에 웃을 땐 잇몸이 활짝 드러나는 소탈한 이미지의 콜비의 특기는 타고난 유머 감각이었다. 브룩클린 억양과 허스키 보이스가 결합된 독특한 목소리를 지녔던 그녀는, 촌철살인의 감각을 지닌 연기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개성이 영화나 TV 드라마에도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첫 주목 받은 건 1971년에 출연한 <형사 콜롬보> 시리즈. 이후 <FBI> <형사 맥밀란> <메디컬 센터> <쿵푸> <건스모크> 등 1970년대 인기 TV 시리즈에 두루 등장했고 연극과 영화를 병행했다. 뉴욕과 할리우드를 오가는 바쁜 삶이었지만, 힌두교 구루(스승을 의미하는 성직자)인 스와미 묵타난다의 추종자였던 그녀는 명상으로 내면을 다스렸고 채식과 금주를 통해 육체를 단련했다. 심령 연구와 타로에도 관심 있었던 콜비는, 외향적 이미지와 달리 정신적 가치와 영적 세계를 중시했던 인물이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메리 타일러 무어 쇼>였다. 그녀는 세상 물정 밝은 매춘부인 셰리 역으로 인기를 끌었고, 1975년에 스핀오프인 <필리스>가 기획되었을 땐 최초로 고정 배역을 따냈다. 여주인공 클로리스 리치먼의 보스인, 포토 스튜디오 사장 줄리 어스킨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필리스>는 9월 8일부터 방영 예정이었고 촬영은 7월부터 시작되었다. 세 개의 에피소드 촬영을 막 마쳤을 즈음인 7월 24일, 그녀는 LA의 베니스 지역에 있는 연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편 밥 레비트와 별거 상태였던 콜비는 한 살 아래의 연인이자 연기 코스를 수강하는 학생이었던 제임스 키어넌과 함께 있었다. 키어넌은 당시 시트콤 단역으로 갓 데뷔한 늦깎이 연기자였다.
경찰은 그 어떤 원한 관계도 찾아내지 못했다. 강도 사건도 아니었다. 몸싸움 같은 걸 벌이다가 총을 쏜 것도 아니었다. 마치 아무 목적 없는 사냥을 하듯, ‘살인 유희’를 즐기듯 밴을 타고 가면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다. 경찰은 결국 ‘묻지마 살인’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40년 동안 콜비의 죽음은 영구 미제 사건 파일 속에 묻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LA의 베니스와 바로 옆 지역인 산타 모니카는 매우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바바라 콜비가 총격을 받기 40분 전, 산타 모니카의 한 거리에선 글로리아 위티라는 57세의 중년 여성이 살해되었다. 그녀는 록히드 마틴의 간부인 남편 롤랜드 위티와 함께 인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때 근처 풀숲에 숨어 있던 3인조 복면강도가 위티 부부와 또 한 커플 앞에 나타나 총을 들이대며 잔디밭에 엎드리라고 명령한 후 귀중품을 챙겼다. 이때 글로리아 위티는 틈을 타 도망가다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범인들은 노상강도를 끝낸 후 노란색 밴을 타고 사라졌다.
그들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산타 모니카의 각기 다른 거리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세 건의 강도 사건이 있었고, 이 와중에 총 세 명이 죽고 여섯 명이 살해 위협을 받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물건을 빼앗겼다. 콜비와 키어넌까지 합하면, 그날 밤 LA에서 다섯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이후 경찰은 여섯 명의 용의자를 검거했지만, 조사 결과 그들은 콜비와 키어넌의 죽음과는 무관했다.
한참 재능을 인정받고 기지개를 켜던 엔터테이너의 죽음에 많은 팬들은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필리스>의 제작사인 ‘메리 타일러 무어 프로덕션’은 콜비가 출연한 세 에피소드를 폐기하고 줄리 어스킨 캐릭터에 새 배우를 영입할 계획도 세웠지만, 추모의 의미로 그녀가 출연했던 세 에피소드를 모두 방영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리즈 토레스라는 배우가 콜비 뒤를 이어 줄리 역을 맡았다. 콜비와 <필리스>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클로리스 리치먼은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으며 “뛰어난 배우이며 가장 유쾌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고인을 추모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