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엽 | ||
이번 회의장에서는 일본 프로야구 세이부 라이온스의 프리에이전트(FA) 유격수 마쓰이 가즈오와 포스팅 시스템(일종의 공개입찰제도)에 오를 다이에 호크스의 2루수 이구치 다다히토 등의 거취도 거론될 가능성이 높아 일본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지에서는 우리의 ‘국민타자’인 이승엽(27·삼성 라이온즈)에 대해서 그리 높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이승엽 관련 ‘장밋빛’ 소식들은 대개 추측성이거나 에이전트측에서 전략적으로 흘린 이야기에 기인한 것일 뿐, 신빙성이 있는 정확한 내용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지난 9일 이승엽이 한국야구위원회(KBO)로부터 FA로 최종 공시되면서 애너하임 에인절스행이 유력하게 점쳐지고 정도다.
지금까지의 주변 여건으로 볼 때 이승엽의 미국 도전은 일본 프로 선수들에 비해 결코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1995년 노모 히데오를 시작으로 스즈키 이치로와 마쓰이 히데키에 이르기까지 일본 프로야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실력을 인정받는 스타들을 많이 배출해왔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 출신의 미국 진출 사례는 투수 이상훈이 능력 탓보다는 ‘주위 환경 적응 실패’로 물러난 것이 전부다. 결국 타자 이승엽은 미개척지에 도전하는 프런티어처럼 스스로 메이저리그에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메이저리그의 시장경제가 지난 2001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계속 냉랭한 하강 곡선을 긋고 있다는 점도 이승엽에게는 악재다. 뉴욕 양키즈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팀들이 긴축 재정을 외칠 정도로 썰렁해, 과거의 화려한 FA시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 한 가지 난점이 있다면 이승엽의 포지션이다. 메이저리그에서 1루수는 거포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들어 추세가 변하고는 있지만, 1루수는 한방이 있는 팀의 중심 타자들에게 돌아가며, 평균 연봉도 포지션별로 항상 1, 2위를 다투는 자리다. 과거 마크 맥과이어부터 양키스의 제이슨 지암비, 휴스턴의 베그웰, 필라델피아의 짐 토미, 콜로라도의 토드 헬턴, 플로리다의 데릭 리에 이르기까지 강타자들의 대명사가 1루수다.
이승엽의 경기를 직접 지켜본 텍사스 레인저스의 스카우트였던 리차드 세코씨의 말처럼 이승엽이 외야수로 전향할 수만 있다면 선택의 폭은 훨씬 넓어질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변신은 만만치 않기에 더욱 힘들다.
그렇다고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도전이 절망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아시아 최고 기록인 56개의 홈런을 뽑아낸 그의 능력이면 양키즈가 데려가 재미를 본 마쓰이 히데키에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작년 시즌 일본 리그에서 50홈런을 친 마쓰이 히데키가 올해 메이저리그 신인으로 16홈런에 그쳤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그가 1백6타점을 올렸다는 대목도 역시 눈여겨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쓰이에게는 매일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승엽 역시 ‘선택’을 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매일 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팀으로 가야 한다는 점이다. 최희섭의 경우 올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불의의 부상으로 출장 기회를 놓치게 되면서 결국 자리를 굳힐 기반을 잃고 말았다.
물론 이승엽이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인 만큼 몸값도 무시할 수는 없는 선택 요소다. ‘국민적 자존심’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쓰이 같은 선수와의 ‘단순 비교’는 금물이다. 마쓰이가 받은 3년간 2천1백만달러(약 2백52억원)는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이뤄졌던 것이라고 봐야 한다. 양키즈가 아니었더라면 전혀 불가능한 계약이며, 아쉬운 이야기지만 특히 그들의 눈높이로는 ‘검증’이 안된 한국 프로야구 선수에게 거액을 투자할 팀은 많지 않다.
에이전트의 능력에 따라 다소 차이는 나겠지만, 이승엽 본인이 연봉 1백50만달러(약 18억원) 이상을 기준으로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보여 느낌은 좋다. 2~3년 계약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후에 대박을 노려야 하며, 앞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의 잣대 역할이 된다는 점에서도 이승엽은 큰짐을 지고 빅리그에 뛰어드는 셈이다.
이승엽에겐 성공 가능성을 짚어볼 수 있는 강점이 분명히 있다. 부드럽고 뛰어난 스윙에, 올 시즌 중월과 좌월 홈런을 23개나 칠 정도로 밀어치기에도 능하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마쓰이의 메이저리그 생존법도 큰 스윙이 아닌 콤팩트 스윙에 의한 밀어치기를 적절히 섞어 중거리 타자로 변신한 것이었다.
이승엽과 관련, 최근 입수된 정보 또한 아주 고무적이다. 가장 걱정스러웠던 점은 이승엽의 스윙 스피드였다. 시속 1백55km가 넘는 강속구를 뿌리는 투수들이 늘어선 빅리그에서는 스윙 스피드가 절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승엽이 지난 봄 플로리다 말린스의 스프링 캠프에 참석했을 당시 말린스 전 선수를 통틀어 두 번째로 빠른 스윙 스피드를 기록했음이 최근 밝혀졌다. 그렇다면 경험만 좀 쌓으면 빅리그 패스트볼을 충분히 쳐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물론 초반에는 변화구가 큰 골칫거리일 수가 있다. 최희섭도 결국 변화구 공략 실패가 올 시즌 중반 좌절의 원인이 됐으며, 마쓰이 또한 시즌 초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변화구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었다.
변화구의 종류는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미국 프로야구에서 이제 큰 차이가 없지만 워낙 투수들이 많고 자신만의 변화구들을 개발하다보니 희한한 구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경험을 쌓아가며 해결할 문제이기 때문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는 애너하임 에인절스가 이승엽의 팀이 된다면 상당히 고무적일 것 같다. LA 인근이라 교포들도 많고, 바로 근처에 한국 타운도 조성돼 있다.
올해 애너하임의 1루수로 2할6푼5리에 16홈런 83타점에 그친 스캇 스피지오가 슈퍼스타가 아니었다는 점도, 이승엽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경우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부분이다.
종합해보면 자존심을 어느 정도 세울 수 있는 연봉에, 매 경기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팀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이승엽에게 가장 중요한 선택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본인의 능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뿐이다.
민훈기 스포츠조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