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바레인과의 친선경기에서 만난 이동국. 그는 이날 첫골을 넣어 화려한 부활의 축포를 쏘아올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상무 입대 직전 친구의 자취방을 숙소로, 연고 없는 대학의 체력 단련장을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삼으며 묵묵히 재활 훈련을 소화해내던 그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패배의 쓴맛을 본 심정과 국민들이 축구에 미쳐있던 월드컵 기간 동안 자신은 축구를 외면하고 살았다며 고개를 숙인 당시의 얼굴 표정 또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씩씩해서 오히려 더 슬퍼 보이던 청년은 이전의 ‘황태자’가 아닌 불투명한 미래를 준비하는 불안정한 축구 선수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본프레레호’에서 다시 태어났다. 쿠엘류 감독 당시 잠시 대표팀에 발탁됐다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또다시 불운을 곱씹어야 했던 이동국이 본프레레 감독에 의해 주전 자리를 꿰차며 ‘제2의 전성기’를 예고하고 있는 것.
지난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평가전에서 아쉬운 무승부를 거둔 뒤 하루를 쉰 이동국은 16일 파주 트레이닝센터에서 중국 아시안컵 출전을 위해 짐을 꾸렸다. 본프레레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 합류하는 첫날 파주로 향하는 짧은 여정 동안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설레임과 떨림이 전율처럼 다가왔다는, 이동국의 너무나 솔직해서 가슴이 찡해지는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머리 스타일이 짧아서일까. 요즘 이동국의 얼굴은 이전과는 달리 야위고 초췌해 보인다. 그래서 인터뷰의 시작을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안부 인사로 대신했다. 그러자 이동국은 “체중은 전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 워낙 훈련을 많이 해서 피곤이 쌓인 게 그렇게 보인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본프레레호’ 입성 후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줄곧 주전 멤버로 기용되며 이동국은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다. 경기 내용면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았다.
“기분 좋아요. 그래서 운동하는 것도 체력적으론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아니 하루하루 운동하는 게 행복했어요. 매일 새로운 걸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이네요. 저에 대한 과분한 칭찬과 기대를 읽을 때마다 무지 기뻐요. 그러면서도 두려워요.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만약 예기치 않은 부상이나 저조한 플레이로 인해 저보다 더 잘하는 선수가 짠 하고 나타나서 제가 물 먹을까봐, 그래서 이 소중한 기회를 다시 잃게 될까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동국의 간절함이 너무 애달파서 가슴이 찡했다. 이동국은 마치 봇물 터지듯 다음 말을 이어갔다.
“본프레레 감독님이 오신 후 처음 대표팀에 발탁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파주)으로 향할 때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세요? 딱 그런 거였어요. 초등학교 1학년생이 입학식 때 처음 가방 메고 학교에 등교하는 그런 기분, 솔직히 예전에는 그런 거 잘 몰랐거든요. 태극마크 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몇 차례 쓴맛을 보고 나니까 파주 입성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겠더라구요.”
얼마전 이관우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대표팀을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비통한 심정으로 짐을 꾸리는 이관우도 그랬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동국은 남의 일 같지 않아 차마 이관우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저랑 잘 맞는 선수였거든요. 패스도 잘 넘겨주고 말을 안해도 제가 움직이는 동선을 꿰고 있다가 알아서 찔러주는 스타일이었으니까요. 무척 아쉬웠어요. 본인은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했겠어요. 유난히 대표팀과 인연이 없다는 징크스가 또 다시 재연된 거죠. 그런데 저라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니까.”
▲ 본프레레호 합류 이후 과거의 불운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이동국의 활약이 눈부시다. | ||
대표팀의 새로운 ‘포커 페이스’로 등장한 본프레레 감독에 대한 느낌을 묻자 “처음엔 좀 답답했다”는 비방송용 멘트가 흘러 나왔다. 그렇게 말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기리그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대표팀에 합류했잖아요. 그동안 쌓인 피로를 채 풀기도 전에 강도 높은 훈련을 받다보니 선수들 모두가 지치고 피곤해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그치고 재촉하는 감독님이 이해가 안되었던 거죠. 그러다 나중에는 선수들도 그분 스타일을 따라가려고 노력했어요. 감독님한테 욕 많이 얻어먹었어요. 주로 훈련에 집중 안한다고 야단치셨는데 나중엔 그런 다그침이 관심으로 해석되더라구요.”
이동국은 ‘고작’ 두 차례의 평가전을 치른 뒤 본프레레 감독의 축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한다는 게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와 감독이 신이 아닌 이상 몇 주 만에 성적내기를 바란다는 건 무리라는 것.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평가전은 선수들 대부분이 몸을 아끼는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시안컵을 앞두고 자칫 잘못해서 부상이라도 당하면 누가 손해겠어요? 물론 비난을 피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도 두 게임 치른 감독님에 대한 평가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경기장이나 훈련장에선 줄곧 굳은 표정으로 일관하는 본프레레 감독이 운동장 밖에선 농담을 건네며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모습에선 새삼 정이란 걸 느끼게 된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님과는 달리 본프레레 감독님은 대화의 문이 열려있는 것 같아요. 히딩크 감독님 주변엔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언론담당, 수석코치, 트레이너, 비디오 분석관 등 감독님 ‘식구’들이 워낙 많다보니 선수들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본프레레 감독님은 선수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시더라구요. 밖에서 보기엔 작은 차이겠지만 선수 입장에선 그게 큰 차이가 될 수 있거든요.”
‘본프레레호’ 입성 후 김은중, 안정환과 각각 투톱으로 나선 이동국 입장에선 어떤 파트너와의 조합이 편하고 플레이하기가 수월했을까. 98프랑스월드컵 대표팀에서 고종수, 안정환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할 때만 해도 이동국은 안정환과 호형호제하며 곧잘 어울렸다. 오랜만에 호흡을 맞추는 사이라 눈에 띄는 부조화도 있었지만 경기 중간 중간 안정환이 이동국을 자상하게 챙겨준 장면들이 떠올라 내심 안정환을 찍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김)은중이랑 서는 게 더 편하죠. 말도 잘 통하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지적해주고 경기 중에는 서로 의지도 되거든요. (안)정환이형이요? 저랑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함부로 말도 못하고 솔직히 여러 가지로 불편했어요.”
왜 함부로 말을 못했냐고 물었다. ‘옛 정’을 떠올리면 그리 불편한 사이가 아닐 거라는 선입견도 한몫했다. 이동국의 입에서 참으로 하기 힘든 말이 흘러 나왔다.
“저랑 정환이형이랑은 격이 다르잖아요. 그 형은 (월드컵을 통해) 완전히 올라선 선수예요. 예전과는 그 느낌이 분명 다를 수밖에요.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더라구요. 형도 저보다는 이전에 함께 했던 선수들(월드컵 멤버들을 지칭하는 듯했다)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보니 따로 만나 얘기할 만한 기회가 없었죠.”
월드컵 출신과 월드컵 출신이 아닌 선수들과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고 했다. 월드컵 출신 선수들이 느낄 수 없는 ‘틈’이 다른 선수들한테는 엄청난 간격으로 전해진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안정환이 모르는 이동국 혼자만의 고민 아닌 고민이었을 것이다.
2003년 2월 초 군 입대 후 광주 상무 불사조 축구단에서 줄곧 뛰어온 이동국은 군 생활에 대해 흡족해 했다. 입대 당시만 해도 새로운 환경이 절실히 필요했고 제한된 공간에서 정신 무장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었던 것.
“처음에는 과연 여기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 싶었어요. 한번씩 대표팀에 차출돼 밖으로 나오면 들어가기가 싫더라구요.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부대가 더 편해요. 사람들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조용히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운동에 쏟는 시간이 많아 저한테는 너무나 좋은 기회인 거죠.”
이동국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기다려주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해왔다. 본프레레 감독이 요구하는 부분을 정확히 읽고 있는 중이라 거듭되는 훈련과 경기를 통해 서로가 만족할 만한 플레이가 나올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다.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기자는 그렇게 믿고 싶은 심정이다. 꺼져가던 불꽃을 다시 태워보려는 이동국의 절박한 마음과 소망이 어떤 태풍보다도 더 강하게 불어왔기 때문이다. 아시안컵을 통해 그가 대표팀의 ‘주류’로 제대로 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안정환과 그 ‘격’을 맞출 수 있는, 그 이상까지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