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양태영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빼앗긴 금메달 때문이냐고 묻자 원래 무표정하다고 한다. 올림픽 선수단 2진과 함께 귀국한 다음날 서울 둔촌동 한국체육대학교 부근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난 양태영은 일부 네티즌들이 ‘너무 금메달에 집착하는 거 아니냐’며 안타까움을 표현한 사실에 대해 “운동선수라면 스위스까지 쫓아가서라도 되찾고 싶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궁금했던 것 한 가지. 귀국 당시 양태영은 한국선수단의 파란색 단복이 아닌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여자선수들 단복)이 난무한 가운데 양태영만이 입고 있는 흰색 와이셔츠는 오히려 눈에 확 띄어 보였다. 왜 단복을 입지 않았는지 물었다. 혹시 체조 오심 판정에 대한 항의 표시는 아니었는지 궁금했기 때문.
“아, 그거요? 윗도리를 잃어버렸어요. 아테네 공항 면세점에서 선물 사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그만 한 상점에 놓고 나온 것 같아요.”
양태영은 귀국 당시 공항의 엄청난 환영 인파와 취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미 아테네에서 인터넷을 통해 올림픽 선수단 1진이 귀국했을 당시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것.
“1진이 먼저 들어갔을 땐 재판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국민들의 엄청난 관심과 폴 햄이 토크쇼에 출연해서 이상한 소리(미국 심야 토크쇼인 <데이비드 레터맨>에 나간 폴 햄이 양태영은 4위짜리 선수라고 비하한 내용)하는 걸 보고서는 포기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폴 햄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폴 햄이 밉냐고 했더니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애써 표현을 자제했다. 이전의 세계 대회에서 만난 폴 햄은 어떤 이미지였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세계 최고 수준의 훌륭한 선수였죠. 세계 체조계를 이끌어갈 만한 유능한 선수였구요. 선수로서 폴 햄을 무척 좋아했어요. 하지만 토크쇼에 출연해 금메달 획득을 당연시한데 대해 무척 실망했습니다. 인격과 인품이 덜 된 것 같아서요.”
만약 폴 햄과 양태영의 입장이 뒤바뀌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묻자 웃으면서 “저도 어디다 숨겨 놓고 안 돌려줬을 것 같아요”라며 솔직한 심정을 내보인다.
양태영은 평행봉을 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조건 잘 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다 철봉 종목에서 두 팔을 놓고 공중회전하는 등의 고난도 기술을 포기한 채 밋밋한 연기를 보여 9.475를 받았다. 양태영은 “철봉에서 조금만 잘했어도 오심과 상관없이 우승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고 회상했다.
“조금만 빨리 오심 사실을 알았어도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너무 급한 나머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저도 선수촌에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어쩐지 시상식이 끝났는데 코치 선생님이 보이지 않으시더라구요. 그후로 연일 ‘아테네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했죠.”
결국 양태영의 금메달 문제는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로 넘어갔지만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선 양태영이 너무 금메달에 집착하는 거 아니냐는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 금메달에 집착하냐구요?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전 그 가능성에 ‘올인’할 겁니다. 물론 4년 뒤 북경올림픽을 기약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압니까?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도둑맞은 금메달을 당연히 되찾고 싶은 거죠.”
동생 태석과 같이 체조 선수로 활약중인 양태영은 2002부산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체조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출전 자체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가 무릎을 쓰지 않는 철봉과 평행봉 위주로 연습을 하며 아시안게임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동생 태석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걸 지켜보며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양태영에게는 생애 최초의 좌절과 시련기였다. 그래도 체조와의 인연은 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체조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체조를 떠나선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더라구요.”
동갑내기인 여자친구에 대해 묻자, 운동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 자신을 기다리고 이해하는 여자라는 사실 외엔 더 이상 말해줄 수 없다며 단호한 표정을 짓는다. 결혼은 북경올림픽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는 설명만 덧붙이면서.
“고1 때 상비군에 뽑혀 훈련중에 감독님이 목표가 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어요. 다른 선수들은 올림픽 금메달, 세계대회 금메달 등을 외쳤지만 전 평안한 가정 갖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가 엄청 혼이 났었죠. 금메달보다 더 중요한 게 가족의 행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금메달이 오락가락하다보니 금메달도 중요하긴 중요한 것도 같고….”
기자와 함께 커피숍에서 나온 양태영은 대학원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간다며 학교로 들어갔다. 배낭을 메고 선글라스를 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