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친척 학살 찢어지는 가난이 ‘젊은날의 초상’
정치인’이 아닌 ‘인간’ 샌더스가 누구인지는 그간 많은 사람들이 알려고도,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무소속인 데다 미국 정치인들 가운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유일한 ‘언더독’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야 정치 평론가, 언론, 그리고 미국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간’ 샌더스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월 9일(현지 시간) 뉴햄프셔주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뒤 불과 수 시간 만에 260만 달러(약 31억 원)의 선거자금을 모금했다. 사진은 샌더스 후보가 이날 밤 뉴햄프셔주 콩코드 하이스쿨에서 프라이머리 승리 연설을 한 뒤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오른쪽은 부인 제인. AP/연합뉴스
대선 출마를 발표한 후부터 유세장 곳곳에서 만나는 유권자들을 향해 샌더스는 이렇게 외치곤 한다. 이는 다시 말해 선거전이 치러지는 동안 샌더스라는 인물의 개인사보다는 정책과 공약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샌더스는 지난 35년간 공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개인 프로필을 자세하게 공개하거나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개인 프로필은 늘 간단했고, 변함이 없었다. 이번 대선 캠페인 홈페이지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 샌더스는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아내 제인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슬하에는 네 명의 자녀와 일곱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가 전부다. 이런 까닭에 샌더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의 정치 경력에 비해 덜 알려진 게 사실.
이와 관련, 정치전문매체인 <폴리티코>는 최근 “샌더스는 상원의원이 되기 전에, 하원의원이 되기 전에,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벌링턴 시장이 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나?”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전부인과 주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특히 20대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 다소 구체적으로 언급한 <폴리티코>는 “20대 시절 샌더스의 여자관계는 다소 복잡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령 첫 번째 부인인 데보라 실링과 이혼한 후 다른 여성과 동거를 했고, 그 후 두 번째 부인인 제인과 결혼했다는 점으로 미뤄 그렇다는 것이었다. <폴리티코>는 “만일 샌더스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로널드 레이건 이후 역대 두 번째의 ‘재혼남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영화배우였던 첫 번째 부인 제인 와이먼과 이혼한 후 낸시와 재혼한 바 있다.
그간 샌더스의 가족 관계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에 샌더스의 유일한 혈육인 레비 샌더스가 첫 번째 부인의 아들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 레비는 동거녀인 수잔 모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으로, 지금까지 레비는 샌더스를 가리켜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전기작가 커트 F. 스톤조차 샌더스의 자서전인 <미연방의회의 유대인>에서 “샌더스는 첫 번째 부인과 아들 레비와 함께 전기와 수도가 나오지 않는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살았다”라고 적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첫 번째 부인인 실링은 “레비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1941년 뉴욕 브루클린 출생인 샌더스는 폴란드계 유대인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페인트 판매를 했으며,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샌더스는 “나는 어릴 때 아버지의 가족들이 전부 히틀러에게 학살됐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은 평범하게 보냈다. 고교 육상부에서 활약했던 샌더스는 브루클린 대학에 입학했으며, 1년 후 다시 시카고 대학에 편입했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운동에 높은 관심을 보였던 샌더스는 ‘인종평등위원회’ ‘학생비폭력평등위원회’ ‘학생평화연맹’ ‘청년사회주의연맹’ 등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를 통해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반전 운동, 노동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등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3년 첫 번째 부인인 실링을 만났던 샌더스는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막 대학을 졸업한 23세 동갑내기였던 젊은 부부의 생활이 넉넉할 리는 만무했다. 신혼집은 몬트필리어 인근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2500달러(약 305만 원)짜리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달콤했던 신혼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8개월 후인 1966년, 실링과 이혼했던 샌더스는 그 후 일정한 직업 없이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정신병원 간호사 보조로 일하거나 정부의 유아교육 프로그램인 ‘헤드 스타트’의 유치원 교사로 일했는가 하면, 비영리 단체에서 푸드 스탬프 등록 업무를 맡기도 했었다.
1969년 뉴욕에서 만난 모트와 동거를 시작했던 샌더스는 아들 레비를 낳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작은 2층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샌더스와 모트는 전기료를 낼 형편이 못돼 종종 전기가 끊기곤 했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당시 샌더스는 목수로 간간히 생활비를 벌었지만 목수로서의 실력은 형편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무렵부터였다. 따라서 샌더스의 정치 인생은 이미 1971년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버몬트주에만 존재하는 소규모 정당이자 좌파였던 ‘자유동맹당’ 소속이었던 샌더스는 당시 상원에 출마하기 위해서 생애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30세가 채 되지 않았던 샌더스는 상원 후보를 뽑는 당회의에 무릎에 갓난 아들을 앉힌 채 참석했으며, “누가 후보를 추천해보라”는 말에 당당하게 손을 들고는 “제가 도전해보죠. 출마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물었다.
그렇게 처음 선거에 출마하게 됐던 샌더스는 그야말로 정치 풋내기였다. 얼마나 떨리고 긴장됐는지 라디오 인터뷰를 할 때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책상에 무릎이 부딪치는 소리가 마이크에 잡혔을 정도였다. 1997년 출간된 자서전격인 <아웃사이더 인 하우스>에서 샌더스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괴상한 떨림음이 전파를 타고 방송됐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얼마나 소리가 거슬렸는지 청취자들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지금 이 사람 누구예요?”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정치 도전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197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마했던 샌더스는 같은 해 주지사 선거에 다시 한 번 도전했지만 역시 고배를 마셨다. 평등주의를 표방하면서 청년층, 노인층, 저소득층,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소규모 사회주의 정당이 미국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1974년 다시 한 번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76년 출마한 주지사 선거 역시 그랬다. 샌더스는 6%도 채 되지 않는 저조한 득표율로 매번 쓴 잔을 마셔야 했다.
1977년 계속되는 낙마에 흰머리가 날 정도로 지쳐 있었던 샌더스는 결국 ‘자유동맹당’에서 탈당했고, 그 후 잠시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주로 버몬트 주민들과 지역 소식, 사건에 관한 영화를 제작했던 샌더스는 비록 탈당은 했지만 정치를 향한 야망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1981년 무소속으로 벌링턴 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샌더스는 단 10표 차이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마침내 공직에 진출했다. 당시 현직 시장에 불만이 많았던 벌링턴 시민들이 ‘불평등 해소’를 외치는 사회주의자인 샌더스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두 번째 부인이자 현재 부인인 제인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시 ‘주민 조직’ 회원들과 함께 현직 시장을 만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던 제인은 주민들의 질문에 즉답을 회피하는 시장의 모습에 실망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마치 버니 샌더스가 질문하는 것 같네.” 당시만 해도 샌더스가 누구인지 몰랐던 제인은 “버니 샌더스가 누군데요?”라고 물었다.
잠시 후 샌더스가 모습을 나타냈고, 그렇게 처음 샌더스를 만났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샌더스의 열정적인 연설을 들었던 제인은 곧 샌더스를 지지하게 됐고, 미래의 남편인 샌더스에게 한 표를 던졌다. 그리고 둘의 첫 만남은 열흘 후 샌더스가 시장에 당선되던 날 밤 축하 파티장에서 이뤄졌다.
버니 샌더스의 신혼 집.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생활 환경이 열악했다.
벌링턴 시장에 당선된 후부터 무명 정치인이었던 샌더스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롤링스톤스>는 당시 샌더스를 가리켜 “푸른 산악 지대의 붉은 시장”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었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영국과 중국 등 외국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런 관심에 대해 샌더스는 “맞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벌링턴의 괴짜 시장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10달러씩 받을 예정”이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시의회의 냉랭한 태도와는 달리 샌더스는 벌링턴 시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83년, 1985년, 1987년 연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던 샌더스는 훗날 “벌링턴 시장 재직 시절 이룬 성과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정치 참여율 증가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해를 거듭할수록 시민들의 투표율은 점점 높아졌으며,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샌더스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 1981년 초선 때 50%를 조금 웃돌았던 득표율이 1987년 4선 때는 56%로 증가했다. 이에 <유에스 뉴스&월드 리포트>는 샌더스를 가리켜 ‘미국 역대 최고의 시장 2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참 잘나가던 샌더스는 1989년 시장직을 그만두고 이듬해 연방하원의원에 도전했다. 보란 듯이 당선됐던 샌더스는 1992년, 1994년, 1996년, 1998년, 2000년, 2004년 연이어 재선에 성공하면서 역량을 과시했다. 1996년 선거에서는 불미스런 일도 벌어졌다. 당시 공화당의 후보였던 수잔 스위처가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샌더스의 뒷조사를 지시했던 사실이 들통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샌더스의 전부인인 실링에게 연락을 취해 샌더스의 흠을 캐내려고 했던 것.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샌더스와 실링은 이혼 후에도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었으며, 오히려 스위처의 뒷조사에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던 실링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샌더스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런 행동이야말로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진절머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게 만들고, 투표를 하지 않도록 만들며, 또한 공직에 진출하지 않도록 만든다”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당시 선거에서 역풍을 맞았던 스위처를 상대로 샌더스는 무려 20%포인트라는 큰 표 차이로 압승을 거뒀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상원의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샌더스는 2012년 무려 71%의 높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1971년 ‘정치 풋내기’로 처음 상원의원직에 도전했을 때 거뒀던 2.2%의 미미한 득표율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수치다.
이밖에도 샌더스는 1987년 벌링턴 시장 재직 시절 30명의 버몬트 음악가들과 함께 <위 쉘 오버컴>이라는 포크송 앨범을 녹음하기도 했으며, 1988년에는 코미디 영화 <스위트 하트 댄스>에 카메오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9년 영화 <내 전여친의 결혼 피로연>에서는 랍비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처럼 ‘아무리 털어도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샌더스의 사생활은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러니 만일 샌더스를 상대로 ‘흑색선전 카드’를 꺼내들 경우 실패할 게 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