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한 박지성은 쉴 틈도 없이 바로 파주 트레이닝센터로 향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첫 경험 세계 올스타전
“요즘 정말 신나는 일의 연속이에요. 안 들어가던 골도 들어가고, 우연찮게 세계 올스타에도 뽑히고, 새해 첫 달을 기분 좋게 시작해서 해피해요.”
박지성의 ‘해피함’이 수화기를 통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내 특유의 겸손함을 잔뜩 담은 멘트가 이어진다.
“세계 올스타전에 뽑혔다고 해서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건 아니잖아요. 나라별로 선수들을 골고루 뽑는 거니까요. 그래도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과 한 팀이 돼 뛸 수 있잖아요. 더욱이 혼자라면 좀 ‘뻘쭘할텐데’ 차두리와 함께 가니까 더욱 좋네요.”
박지성은 차두리(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오는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FIFA 주최 쓰나미 돕기 자선경기에 세계 올스타로 선정됐다. 한국 선수 2명이 세계 올스타로 동시에 뽑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잘나갈 때 조심
박지성은 81년생 닭띠다. 닭띠해를 맞은 올해 연일 좋은 소식을 쏟아내고 있어 닭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다. 잘나간다고 해서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걸림돌’로 폭삭 주저앉는 일이 가끔 있어왔던 것. 그가 말하는 ‘걸림돌’은 바로 부상이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또 항상 잘 할 수만도 없고. 부상으로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는 이런 기분 모를 거예요. 그래서 희로애락에 ‘올인’하지 못해요.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나빠져도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또 그럴 자신이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진 않아요.”
국내파의 겁난 도전
해외파가 빠진 상태에서 미국 LA전지훈련을 다녀온 대표팀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박지성은 언론에서 국내파와 해외파의 경쟁을 부추기는 부분에 대해서 이해는 하면서도 대단히 조심스런 반응을 나타냈다. 해외파라고 해서 실력이 월등히 뛰어난 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서로 뛰는 리그가 다를 뿐이지 어느 소속이든 대표팀에 뽑힐 정도의 실력이라면 엇비슷하다고 봐요. 누구나 경기에 주전으로 뛰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누가 경기 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치느냐가 중요한 거죠. 해외파라고 해서 ‘붙박이’란 생각은 하지 않거든요.”
혹시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이 주전으로 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박지성이 “내가 빠질 거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요?”라고 말하면서 멋쩍게 웃는다.
▲ 지난 2003년 7월20일 수원에서 열린 LA갤럭시와의 피스컵 경기에서 박지성이 공을 몰고 있다. | ||
박지성과 함께 네덜란드리그에서 활약했던 송종국과 J리그의 유상철이 각각 수원 삼성과 울산 현대로 복귀하면서 ‘국내파’로 돌아왔다. 여전히 ‘해외파’로 살고 있는 박지성의 시각이 궁금했다.
“선수가 외국 생활을 하는 건 지켜보는 것과 직접 감당하는 것과는 아주 많이 달라요. 그 선수 입장이 아니라면 뭐라 할 수가 없죠. ‘축하한다’고 말하기는 뭐한데 그래도 그분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합니다.”
담담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송종국의 국내 복귀에 대해선 짙은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같은 리그에서 생활한 선수이기 때문에 그 안타까움이 더 큰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종국이형의 실력이 떨어지거나 통하지 않아서 한국으로 돌아간 게 아녜요. 수준 높은 선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최선의 결정을 내린 거죠. 그래도 아쉬워요.”
PSV와 재계약?
현재 4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송종국에게는 군대 ‘짠밥’이 앞선 ‘선배’로서 여유로운 조언 한 마디를 던졌다. “난 여름에 (군대에) 들어갔고, 종국이형은 겨울이라 감이 잘 오지 않지만 적응하기 나름이니까 훈련도, (축구)연습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박지성은 2006년 여름까지 PSV 에인트호벤과 계약이 돼 있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벌써부터 국내 언론에선 박지성의 빅리그 진출을 점치며 애드벌룬을 띄우는 중이다. 정작 본인은 선수 생활의 또 다른 도약이 될 수 있는 이적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특별히 빅리그 진출이라고 해서 PSV보다 무조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팀 수준으로 따진다면 PSV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팀이니까요. 특히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잖아요(실제로 에인트호벤은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에 성공, 오는 22일 AS모나코와 일전을 앞두고 있다). 무조건 빅리그라는 목표를 내세우며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세우기보다는 내용이 알찬 팀, 내가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팀에서 뛰고 싶어요. 그 팀이 PSV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박지성은 에인트호벤과의 재계약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재계약 후에 지속적으로 빅리그 진출을 꾀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지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이다. 그러나 프리미어리그의 하위권팀이나 중상위권팀이라도 후보선수로만 머문다면 굳이 이적을 도모하기보다 잔류를 택하겠다는 것. 박지성다운 ‘알뜰한’ ‘실속있는’ 진로 계획이다.
▲ 지난 4일 파주 트레이닝센터로 향하면서 기자와 얘기하는 모습. | ||
2003년 1월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해서 꼬박 2년을 보낸 박지성은 완전히 네덜란드리그에 적응한 것 같았다. 언어 소통 문제와 낯선 환경 등으로 인해 외롭고 고단한 생활을 호소했던 이전의 박지성이 아니었다.
“이젠 네덜란드어는 능통하겠네요?” 어느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가 네덜란드어’라고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뇨. 그대론대요.” “그럼 영어는요?” “그것도 변함 없는데요?”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그러나 4일 공항에서 만난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는 “히딩크 감독이 이영표에게는 영어로, 박지성에게는 네덜란드어로 말한다”고 전하면서 박지성의 네덜란드어가 의사 소통 수준은 된다고 설명했다).
축구인생의 위기
성실함의 대명사로 꼽히는 박지성도 분명 위기는 있었다. 가장 심각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네덜란드에 오자마자 무릎 부상으로 1년 넘게 뛰지 못했을 때죠.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형편없는 선수였기 때문에 동료들 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가끔은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박지성은 교토퍼플상가의 강한 잔류 요청을 물리치고 네덜란드로 이적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요. 실제로 그런 얘기(일본으로 U턴)도 나왔고 그 문제를 놓고 히딩크 감독님과 진지하게 상의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기가 억울했고 창피했어요. 그런 모습으로 가버리면 동양인에 대한, 한국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영 아닐 것 같더라구요.”
박지성이란 한국에서 온 선수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돈 아까운 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말겠다는 오기와 노력이 지금의 박지성을 있게 했다고 한다. 힘든 상황이 너무 버거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박지성이란 이름 석자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숱한 갈등과 번민과 유혹의 터널을 지나 네덜란드의 성공한 용병 선수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박주영 열풍에 대해
박지성은 지난해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성인대표팀 시절 딱 한 번 박주영과 함께 훈련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박지성의 기억엔 박주영이란 선수가 ‘어린 나이에도 대단히 침착한 후배’였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는 주영이 때문에 난리가 아니라면서요? 좋은 일이죠. 축구스타가 탄생했다는 건. 난 주영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월드컵 때 한바탕 홍역을 치렀잖아요. 겪어보니까 중심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면에서 언론의 표적이 되다보면 그로 인한 부담과 스트레스, 정신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거든요. 그런 부분을 잘 추스르는 게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이전 김남일과의 ‘리얼토크’에서 김남일이 밝혔던 ‘사건’의 진실을 알아볼 시간이다.
“한국에 와서 외출할 땐 아버지에게 무조건 ‘남일이형 만나러 간다’고 하고 다른 데로 샌다면서요? 그래서 김남일 선수가 박지성 선수 아버지께 괜한 오해를 받았다며 억울해 하던데요?”“어휴, 그거 잘못 알고 계시는 거예요. 전 남일이 형 만나러 나간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얘기 안 해도 제가 외출하면 아버지가 남일이 형 만나러 나가는 줄 아신 거예요. 그거 제 탓 아닌 거잖아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