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형 카리스마 승현이형 센스… “ 다 내것으로 만들고 싶어”
▲ 지난해 챔피언전에서 아픔을 맛본 김주성이 올 시즌 팀의 우승을 이끌며 MVP에 올랐다. 오른쪽은 김주성의 정신적 지주인 허재 코치. | ||
신인왕-정규리그 MVP-플레이오프 MVP를 휩쓴 TG삼보의 파워포워드 김주성(26)은 ‘생각대로’ 겸손했고 ‘생각 외로’ 달변가였다.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찢어진 가난 속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시작한 농구 인생이었지만 선수로선 개인상 그랜드 슬램이라는 영광을 얻는 등 김주성의 라이프 스토리는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20일 서울 목동의 한 방송국 앞에서 만난 김주성과의 맛깔스런 인터뷰를 소개한다.
1년차 행운 3년차 노력
프로 데뷔 첫 해에 맛본 우승과 어느새 3년차가 된 올 시즌 다시 찾아 온 우승컵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내는 모양이다. 신인 때의 우승이 팀을 잘 만난 ‘행운’이었다면 올해의 우승은 땀 흘린 노력의 대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차일 때는 강박관념이 강했어요. 아마추어에서 아무리 날고 기었다 해도 프로에선 그 실력이 통하지 않을 거란 비판적인 시각들이 있었거든요. 성공 여부를 50:50으로 봤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당시엔 그렇게 말한 사람들에게 한방 먹이려고 애를 썼는데 그로 인해 스트레스 엄청 받았죠.”
다음 해는 ‘2년차 징크스’란 굴레로 자신을 묶어두려는 여론들을 의식해 오히려 ‘2년차 징크스’를 깨려고 노력했고, 올해는 지난해 챔피언결정전에서 어이없게 패한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규리그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긴장을 풀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올 시즌엔 정규리그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1위 자리를 고수한 탓에 그 정상을 지키는 스트레스가 또 만만치 않더라구요. 챔피언결정전 2차전까지 2승을 거두면서 선수들은 우승을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다 3차전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했죠. 그것도 20점인가를 앞서고 있다가 뒤집어진 거니까 얼마나 한심스러웠겠습니까. 솔직히 저도 많은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어 거의 움직이지를 않았거든요. 패스만 돌리고. 그래도 그런 실패가 전화위복이 돼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봐요.”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김주성한테 허재는 ‘정신적인 지주’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전주 KCC에게 석패한 뒤 라커룸 입구에서 엉엉 울던 이유도 허재의 은퇴 무대에 우승이란 값진 선물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아, 저 우는 거 보셨어요? 숨어서 울었는데…. 저한테 허재 형은 ‘신’이나 마찬가지예요. 제가 어렸을 때 농구대잔치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잖아요. 그때의 허재 형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렇게 엄청난 대선수와 제가 한 팀에서 뛰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이죠. 그런 형이 선수 생활을 접는 마지막 무대에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었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가자 정말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라구요.”
허재는 올시즌 TG삼보의 우승을 지켜보기 위해 미국 유학 중 깜짝 귀국해 현장에서 후배들의 플레이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2차전 때는 몸 풀고 있는 김주성을 따로 불러 경기에 대한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주성이 허재한테 가장 부러워하는 부분은 카리스마와 보스 기질이다. 모든 후배들을 챙기는 능력과 자신의 감정 표현을 통해 분위기를 장악하는 부분,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기록들, 그리고 주량 등은 김주성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허재만의 아성이라는 것이다.
김주성한테 계속 허재와 관련된 얘기를 묻기가 좀 미안했지만 그도 주저 없이 대답을 하는 탓에 두 가지 질문을 더 추가했다. 다음은 기자의 질문 내용이다.
“허재씨가 은퇴하기 전에 TG삼보의 모습은 마치 감독이 2명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벤치엔 전창진 감독이, 코트엔 허재 선수가. 선수 입장에선 좀 불편하지 않았나요?”
“두 분은 워낙 절친한 관계라 서로 이해하려고 애쓰셨어요. 허재 형이 선수들에게 다그치는 스타일이라면 감독님은 그걸 풀어주는 스타일이었죠. 불편하다는 생각, 전혀 없었어요.”
최근 신선우 전 KCC 감독이 그만두면서 농구판에 감독들의 자리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면서 허재가 KCC 감독으로 갈 거란 소문이 나돌기도 했었다. TG삼보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거나 다름 없는 허재가 만약 다른 팀 감독으로 간다면 그를 따르는 김주성은 어떤 심정일까. 그런데 예상 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오히려 더 편할 것 같은데요? 김태환 감독님이 LG에 계셨을 때 중앙대 시절 절 지도하셨던 분이라 막상 경기장에서 만나면 굉장히 부담스러울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LG만 만나면 펄펄 날았어요. 성적도 가장 좋았구요. 상대팀 감독과 선수로 좋은 모습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요.”
‘튀지 않기’ 트레이닝
코트 밖에서의 김주성은 코트에서처럼 여전히 성실하고 깍듯한 매너가 돋보였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로서의 거만함이나 우쭐거림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너무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탓에 자칫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다.
“제가 초고속 성장을 이룬 스타일이잖아요. 남들보다 뒤늦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은 뒤 굴곡 없는 상승세를 이뤘어요.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겠더라구요. 일부러 더 고개를 숙였어요.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힘 빼는 연습도 했구요. 튀는 건 최대한 자제했어요. 그렇게 튀지 않아도 튀어 보였으니까. 그런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지금의 김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욕 안 먹으려고 발버둥치는 거 같죠?”
‘끼’가 있냐고 물었더니 ‘끼’와 김주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운동밖에 모르는 삶이었고 지금도 그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단다. 그러나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 조금씩 외향적으로 바뀐다거나 선후배들과 술자리에서 곧잘 어울리기도 하고 옷 입는 거나 머리 모양 등에 관심과 투자를 하는 부분 등은 프로 이후 가장 큰 변화라고 말한다.
아직 배울 게 너무 많아
비록 개인상으로 그랜드슬램을 기록한 김주성이지만 아직은 자신의 존재가 최고라거나 톱이 됐다는 등의 자부심은 전혀 들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보다 월등한 기량을 가진 다른 선수들한테서 배울 점이 너무 많다는 것.
“허재 형한테는 성격을 배우고 싶어요. 불같은 성격이면서도 후배들을 끔찍이 챙기고 상대팀과 ‘맞장’을 떠서 제압하는 대단한 카리스마는 꼭 본받고 싶어요. 삼성의 (서)장훈이 형한테는 게임을 이끌어가는 부분을, 그리고 (이)상민이 형으로부턴 용병들과의 절묘한 호흡을, (김)승현이 형한테서도 센터와의 기막힌 호흡을 어떻게 맞추는지, 그 센스가 어떻게 생기는 건지 다 배우고 싶어요. 이렇게 쟁쟁한 선배들이 버티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 이영미기자(왼쪽), 김주성선수 | ||
부모님과 여자친구
이제는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김주성은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와 척추 장애를 앓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한’이 많다. 그 불편한 몸으로 꼬박 경기장을 찾는 부모님의 정성에 김주성은 선뜻 “부모님은 농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농구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어렵게 살아온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기 위함이라고.
“전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프로 데뷔하면서 어려운 가정 형편이 알려지고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덧붙여져서 제가 굉장히 착하고 효자라는 소문이 나더라구요. 부끄러웠어요. 마냥 ‘착한표’ 김주성은 절대 아닌데 말이죠.”
총각한테 빠질 수 없는 레퍼토리인 결혼과 관련된 질문도 해봤다. 항간에 여자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있어 빙빙 돌려 물어봤는데 의외로 순순히 시인한다. 대신 여자친구의 프로필은 공개하기를 꺼려했다. 그로 인해 여자친구가 겪을 불편함이 싫기 때문이란다. 더욱이 아직 결혼 여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공개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제 성격이 내성적이라고 말했잖아요. 여자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은 편이죠. 한때는 성격을 개조하기 위해 일부러 선배들 따라 나이트클럽을 전전하기도 했었어요. 이런 사람인데 연애하는 게 어디 쉬웠겠어요? 그런 절 잘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결혼은 서른 살 정도에 하고 싶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구요, 그 전엔 운동 때문에 가정을 꾸리는 데 대해 신경을 못 쓸 것 같아서요.”
NBA행 욕심 안낸다
김주성의 시력이 양쪽 다 0.1 미만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프로 입단할 때부터 조만간 라식수술을 받을 거라고 공표를 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이전의 시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농구를 하고 있는 그이다.
“수술이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솔직히 수술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거든요. 수술 이후 이전처럼 좋은 성적을 못 내면 어떡하나 싶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어요. 한번은 렌즈를 껴봤는데 하루도 못 버티고 바로 뺐어요. 골대가 너무 명확히 보이니까 오히려 골이 더 안 들어가더라구요. 당분간 수술은 못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프로 데뷔 후 줄곧 거론되고 있는 NBA행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도 의외의 대답이 튀어 나왔다.
“전 이미 늦었어요. 나이도 많고 실력도 부족하구요. 만약 어린 나이라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시간이 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후배들이 먼저 길을 열었다는 데 만족하려구요. 그렇다고 꿈을 버린 건 아니에요. 단 무리한 욕심을 갖다 보면 현재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봐서요. 제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한 거죠.”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 동안에 김주성은 자신에 대해 많은 걸 보여줬다. 일정상 ‘취중토크’를 하지 못한 게 서운할 정도였다. 그러자 김주성이 이렇게 한방 먹인다. “아마 술 마시면서 인터뷰했으면 제대로 못하셨을 거예요. 제 주량이 허재 형도 두손 든 주량이니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