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자식…‘지성’ 이면 감천
▲ 지난 1일 앙골라전 장면.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12년간 다녔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오니까 막막했다. 당장 뭘 해 먹고 살 지 앞이 캄캄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회사 눈치 안 보고 지성이 뒷바라지를 원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감격하기도 했다.
그동안 지성이가 게임 뛸 때마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둘러대며 출근을 미뤘었다. 한 번은 한 달 이상 휴가를 내고 지성이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준결승전이나 결승전에 진출하기라도 하면 어떤 변명을 해서라도 결근을 했는데 상사 입장에선 이런 내 모습이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처음 밝히는 내용인데 지성이가 축구 시작하기 전에 사실은 내가 먼저 축구 선수로 활동했었다. 물론 프로가 아닌 직장 동호회의 아마추어 선수였다. 점심 식사 이후 오후 1시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공을 찼다. 주로 공격수 자리에서 볼을 찼던 것 같다. 주변에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정작 내 아들이 축구를 시작했을 때는 격려와 이해, 배려를 통해 보이지 않은 응원을 보내줬다. 지금도 그분들한테 감사할 따름이다. 신기한 건 내가 다녔던 공장에서 아디다스의 축구공 가죽을 생산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지성이가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내 삶 속에도 포함돼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지성이가 축구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때 겉으론 크게 반대했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하고 내버려둔 데에는 이런 사연도 무시할 수 없었다. 축구를 사랑했던 아버지, 아마추어였지만 축구에 목숨 걸었던 아버지, 축구공 가죽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 등등 지성이와 나는 축구와 관련해서 숙명처럼 얽힌 뭔가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 대형 할인 마트의 코너를 임대받아 정육점을 운영했다.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2~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잘 굴러갔다.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순전히 지성이 엄마의 몫이었다. 난 경기장은 물론 전지훈련까지 따라가서 지성이와 축구부를 뒷바라지했다. 자연스레 학부모회의 총무 일까지 도맡았는데 누구보다 지성이가 좋아했던 것 같다. 가게에서 퍼다 나른 고기 때문이다. 돈은 없어도 고기만큼은 양껏 먹이려고 팔다 남은 고기는 무조건 학교로 가져갔었다.
그러다 1998년 IMF를 맞았다. 마트의 정육점을 처분하고 수원의 아파트 상가를 분양받아 정육점과 반찬 가게를 차렸다. 솔직히 가게는 뒷전이었다. 지성이가 축구선수로 얼마만큼 성장하느냐가 최고의 관심사였다. 우리 부부가 버는 돈은 지성이 뒷바라지하는데 들어가는 돈 밖에 안 됐다. 더 많은 돈을 벌었으면 했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돈은 지성이 성공 시킨 뒤에 벌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 중학생 시절 박지성의 경기 모습. | ||
요즘엔 지성이한테 이렇게 말한다. 형제가 없으니까 주위에 진짜 동생 같은, 형 같은 사람들을 사귀어 두라고 말이다.
난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다. 아마도 지성이가 아버지의 이런 부분을 가장 싫어할 것이다. 그래도 난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축구를 시작한 이후 내가 생각한 잣대에서 지성이가 어긋나게 행동하는 걸 보지 못했다. 가끔은 튀거나 반항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묵묵히 받아들이고 따랐다. 얼마 전엔 아들한테 물었다. 아버지가 잔소리할 때마다 대들고 싶지 않았느냐고. 지성이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빠한테 대들면 그 화가 모두 엄마한테 쏠리기 때문에 그래서 꾹 참았다”고. 지성이는 자기 문제로 인해 부부싸움 하는 걸 보기 싫었던 것이다.
지난 3월 1일 앙골라와의 평가전을 위해 한국으로 들어가는 지성이한테 난 또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말았다. “한국에서 축구 경기 끝나면 곧장 집으로 들어가야 해. 선수들과 어울리고 싶으면 (정)경호나 만나 알았지?”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아버지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