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은 이미 ‘보름달’이더라
▲ 2만 3000석 규모의 마제스키 스타디움이 135년 만에 프리미어리그에 오른 레딩 FC를 응원하는 홈팬들로 가득 찼다. 전광판에 설기현이 소개되자 환호는 최고조에 달했다. | ||
설기현이 뛰는 레딩 FC와 미들즈브러와의 2006-2007 프리미어리그 개막일 경기가 있었던 지난 8월 19일(이하 현지시간) 런던 패딩턴역에서 기차에 오른 지 25분 정도 지나니 레딩역이다. 그리 크지 않은 레딩 역사를 나오자 135년 만에 최고 리그 경험을 가지게 된 레딩 팬들의 기쁨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 10분을 달렸을까. 레딩 유니폼을 입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나며 멀리 마제스키 스타디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2만 3000여 석 규모의 그리 크지 않은 스타디움으로 구단주 마제스키의 투자로 지난 1998년 문을 열었다.
경기 시작까진 아직 두 시간 남았지만 경기장 주변은 파란색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었다. 유독 긴 줄이 눈에 들어와 눈으로 줄의 끝을 좇았다. 구단 관련 상품을 파는 ‘메가스토어’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었다. 역시 유럽축구의 힘은 줄을 서는 수고까지 감수하며 구단 용품을 사주는 팬들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왔으니 기쁨은 예년과 다를 것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74세의 케빈 씨는 50년 동안 레딩의 팬이었지만 오늘같이 기쁜 날은 없었다며 감격해했다. 하긴 50년 동안 한 팀을 응원해 오면서 단 한 시즌도 최고의 리그에 속해본 적이 없었으니 프리미어리그 승격 첫 경기에 대한 감동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축구문화는 아무리 하위리그의 약팀이라고 해도 팬들의 충성도가 엄청나다. 강팀은 챔피언을 유지하기 위해, 약팀은 도전이란 목표 의식이 뚜렷해 팬들이 이탈하지 않는다.
▲ 레딩 홈구장의 메가스토어에 줄을 서 있는 팬들(위). 올드 트래포드의 메가스토어에선 박지성 티셔츠도 판다. | ||
마침내 경기 시작. 설기현은 관중들을 향해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친 뒤 그라운드를 뛰었다. 오른쪽 날개로 출전한 설기현은 한마디로 펄펄 날았다. 전혀 밀리지 않는 몸싸움과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상대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그러나 레딩은 초반 11분과 21분 연달아 골을 허용하며 프리미어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그래. 프리미어리그가 어떤 곳인가. 2점차 정도로 패한다고 해서 누가 욕하겠는가. 하지만 레딩 선수들은 포기를 몰랐다. 그 출발은 설기현이었다. 전반 42분 페널티지역 오른쪽 안까지 치고 들어간 설기현이 키스톤의 추격골을 도운 매서운 땅볼 크로스를 올렸다. 신이 난 레딩은 1분 뒤에 시드웰의 골까지 터져 전반을 2-2로 마쳤다. 후반 11분 설기현은 역시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강한 땅볼 크로싱을 골문을 향해 때렸고 혼전 중 리타의 발 끝에 걸리고 말았다. 가장 재밌다는 펠레 스코어로 경기가 마무리됐다. 단연 경기 MVP는 설기현이었다. 골을 터트린 선수는 아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친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설기현의 얼굴은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하지만 설기현도 알 것이다. 이제 또 다른 세계에 한 발을 겨우 내디딘 것뿐이라는 사실을.
▲ 맨유의 부자 열혈팬. | ||
맨유의 열혈 서포터스라는 데릭 존스턴 씨는 “우리는 세계 최고다. 올 시즌도 그럴 것이고 박지성의 역할이 크다”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올 시즌 박지성은 주전 확보라는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1주일에 1억 원이란 고액 연봉자가 됐지만 경기를 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상대로 풀럼 전은 교체멤버였다. 루니, 호날두, 긱스, 스콜스, 사아가 펄펄 날면서 5-1로 이겨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박지성이 넘어야 할 벽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한 한판이었다. 왼발의 마법사 긱스가 못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박지성을 위해서는 체력 부담을 느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경기 뒤 박지성과의 인터뷰가 불발됐다. 그동안 한국 기자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언론 담당관 다이아나 로가 휴가 중이라 신경을 써주는 관계자들이 없었다. 박지성의 아버지에게 SOS를 치자 급하게 경기장 밖으로 나오셨다. 박지성은 인터뷰를 해주고 싶은데 여의치 않다며 먼 길을 왔는데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새삼 박지성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실감한 하루였다.
아버지는 기자들에게 박지성의 올 시즌 대우에 대해 얘기를 해줬다. 비록 41%의 세금을 내지만 1주일에 1억 원 연봉자가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했다. 여담으로 박지성은 한 달에 한 번 돈이 입금되는데 주당 2억 원 이상을 받는 웨인 루니, 호날두, 리오 퍼디낸드 등은 주급으로 돈을 받는다고 한다. 결국 박지성은 전화 인터뷰로 대신했다. 그 인터뷰 내용은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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