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요?…모든 경기가 내겐 마지막”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갈색 폭격기’로 10년 넘게 현역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신진식(32·삼성화재)은 최근 이러한 변화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대학 시절과 실업 1, 2년 차에 감당 못할 인기를 얻은 이래 배구 코트에서 느끼는 뜨거움은 실로 오랜만이기 때문. ‘내가 뛰는 동안에 용병은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던’ 예상이 2m가?넘는 거구 레안드로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현실도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씩 은퇴하는’ 심정으로 뛰는 신진식의 올시즌은 일단 ‘맑음’이다. 부상과 재활로 지루한 시간들을 보냈던 그에게 올해는 1차전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이변’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제는 안타까움과 미련을 버리고 여유있게 경기를 풀어가는 관록도 붙었다.
무뚝뚝하고 내성적일 줄 알았던 신진식의 오픈 마인드로 인해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갈색 폭격기’와의 리얼토크를 소개한다.
# 배구도 인기 종목
키가 클 거라곤 충분히 예상한 일인데 남자 얼굴이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다. 외모를 가지고 10분 넘게 수다를 떨다가 배구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에 대한 질문으로 가볍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삼성화재가 겨울리그를 석권하다보니 경기장에 관중들이 없었어요. 당연하겠죠. 어차피 삼성이 이길 텐데 뭐 하러 경기보러 오겠어요. 그러다 삼성이 작년에 준우승하고 용병들이 가세하면서 조금씩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죠. 삼성이 지니까 재미가 생긴 거예요. 더욱이 지난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구기 종목이 모두 저조한 성적을 냈는데 반해 배구가 금메달을 땄던 게 시즌 개막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아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배구계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배구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고. 그러나 신진식은 한국에 돌아가면 금메달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예상했단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 높이뛰기에서 배구로
신진식은 원래 육상 선수였다. 육상부에서도 높이뛰기 대표 주자로 활약했다. 그러다 배구부에 스카우트되었다. 하지만 육상부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훈련은 배구부에서 하되 중요 대회가 있을 때는 육상 선수로 참가해 달라는 요구였다. 한동안 배구와 높이뛰기를 병행하던 신진식은 전라북도 대회에 나가 별 볼일 없는 성적을 낸 뒤론 높이뛰기를 포기하게 됐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은퇴한 김세진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삼성화재 입단 이후 줄곧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양대 산맥을 이룬 사이인 데다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실과 바늘로 붙어 다닌 사이였다. 신진식은 김세진의 은퇴를 ‘아쉽다’는 말로 풀어갔다.
“많이 아쉬워요. 좀 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오래 전부터 은퇴는 같이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려 많이 서운했어요. 제가 1년만 더 같이 하자고 만류했었거든요. 그래도 뿌리치더라구요. 허전하고 섭섭했지만 끝까지 말릴 수는 없었어요.”
▲ 지난 7일 구미 LIG와의 경기에서 신진식이 경기를 마무리하는 스파이크를 내리꽂고 있다. “코트에 섰을 때 살아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처럼 가장 멋진 순간이다. 연합뉴스 | ||
“이젠 대표팀에서나 소속팀에서도 최고참이에요. (김)상우 형이 있는데 지금 부상 중이라 팀 훈련에 합류를 못하거든요. 어려워요. 뭘 하든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게. 아파도 제대로 못 쉬어요. 감독님이 후배들 생각해서 아파도 좀 참으라고 하시거든요. 후배들이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다가오려고 하질 않아요. 농담도 해야 하고 우스갯소리도 곁들여야 하고. 그래서 받아주면 고마운 거고, 안 받아주면 민망하고 그래요.”
# 부상과 재활의 반복
신진식의 운동 세계에서 ‘부상과 재활’은 결코 빠질 수 없는 단어들이다. 어깨와 손목, 발목, 무릎, 허리 등 안 아프고 안 다친 데가 없다. 손목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다가 어깨에 손상이 갈 때도 있었고 왼쪽 발목 수술로 목발을 짚고 다니다 오른쪽 발목에 무리가 와서 다시 재활의 늪에 깊이 침잠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온몸이 종합병동이에요. 한때 재활이 너무 지겨워서, 죽을 만큼 지겹고 힘들어서 운동이 하기 싫어질 때도 있었어요. 겨울리그에서 1차전부터 뛰어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 오죽했겠어요. 그래도 죽을 둥 살 둥 해서 몸 만들어 코트에 서면 비로소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최면 속에서 지금까지 선수로 뛴 것 같아요. 전 은퇴 시기가 없어요. 어느 순간부터 ‘올시즌이 마지막이다’라는 기분으로 뛰고 있으니까요.”
# 공짜 ‘주전’은 없다
부상과 재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있다고 한다. 바로 주전 자리다. 몇 개월 동안 재활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팀에 복귀하면 어느새 후배가 급성장한 후 자신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때는 말 못할 가슴앓이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2004년에 어깨 수술을 하고 그해 제대로 시합을 뛰지 못했어요. 준결승전부터 투입이 됐는데 제가 비운 자리를 (이)형두가 잘 해주고 있더라구요. 한동안 초조했어요.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는 걸 알기 때문이었죠. 차고 올라가서 후배가 빼앗은 자리를 제가 다시 차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 그냥 도태되고 말거든요. 솔직히 이렇게 빌기도 했어요. ‘조금만 못 해라. 나보다 조금만 못 해서 내가 들어가게 해주라’하는 마음이요.”
너무나 솔직한 표현이었다. 나이를 먹고, 부상으로 예전만 못한 체력을 느끼면서, 불안해하면서, 후배와 자리 다툼을 벌여야 하는 당시의 절절한 상황들이 신진식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때는 스포츠 세계의 냉정함보다는 다분히 인간적인 신진식의 입장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 ‘용병시대’ 신기해
프로배구가 흥행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는 용병들의 볼 만한 싸움이다. 지난해 현대캐피탈의 루니가 배구판을 장악했다면 올시즌에는 각 팀마다 걸출한 용병들이 ‘짠’ 하고 나타나 순위 다툼에 절대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