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을 둔 부모라면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특히 운동하는 아들을 타지에 보낸 부모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직접 쫓아다니면서 뒷바라지할 수 없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다 보니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물질로 해결하려 했다. 가급적이면 돈 때문에 마음 고생 안하게 하려고 용돈을 많이 보내줬다. 어쩌면 그런 행동이 홍만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단 우리의 미안함을 대신하려 했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람을 써서라도 홍만이를 보러 갔어야 했다는 점이다. 홍만이에게는 쓰지도 못하는 용돈보다는 부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는 게 큰 행복이었는데 우린 그걸 알지 못했다.
덩치만 컸지 한없이 여리고 순수한 막내 아들에게 부모의 살가운 정을 듬뿍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지금까지도 그 아쉬움이 한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