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도 이제 인물 보고 뽑는다 아잉교~”
대구 동구을 무소속 유승민 당선인이 13일 선거캠프를 나서고 있다. 벽에 걸린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유 당선인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제 대구도 사람 보고 뽑는다.”
선거 당일 김부겸 캠프에서 지지자들이 준비한 현수막 문구다. 이 한마디가 바로 20대 총선 대구의 선거 결과를 압축했다. 13일 대구에서는 오전까지 제법 비가 내렸다. 하지만 집권 여당에 성난 민심을 비가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대구 선거구 12곳 중 4곳이 비 새누리당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19대 총선 당시 대구의 12개 선거구는 모두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몫이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상전벽해’나 다름없었다.
그 중심이었던 대구 수성갑의 김부겸 더불어민주당(더민주) 당선인의 캠프는 이날 승리를 예감한 듯 출구조사가 나오기 전부터 사람들이 북적였다. 김 당선인은 출구조사 발표를 앞둔 5시께 일찌감치 캠프에 자리했고, ‘압승’이 예상되는 결과가 발표되자 캠프는 축제 분위기로 뒤덮였다.
김 당선인은 앞서 두 번의 실패를 회상한 듯 주변 캠프 관계자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출구조사 결과는 실제 결과와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후 10시가 되기도 전에 선거 결과는 김 당선인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발표가 나왔다. 김 당선인은 최종적으로 62.3%를 득표하며 37.7% 득표에 그친 여권 거물 김문수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31년 만의 대구 야당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지난 13일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선거캠프에서 당선이 확정됐다는 소식에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지난 14일 고배를 마신 새누리당 김문수 선거사무소는 굳게 잠겨 있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반면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김문수 후보의 캠프는 이미 패배를 예상한 듯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캠프에 김 후보는 보이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열혈 지지자들만 눈에 띄었다. 언론사 대부분은 김 당선인의 캠프로 옮겨간지라 김 후보의 캠프는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한 지지자는 “결국 진인사 대천명이다”라고 혀를 차며 캠프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한편 다음 날 <일요신문>은 김 후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캠프를 다시 찾았지만 사무실은 소등된 채 단단하게 문이 잠겨 있었다. 김 후보는 이날 결과에 대해 “수성구민의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소감을 SNS를 통해 남길 뿐이었다.
어찌 보면 대구 북구을의 무소속 홍의락 당선인의 승리는 앞서 김 당선인의 승리보다 뜻밖이었다. 홍 의원은 지난 19대 국회 당시 지역안배 차원에서 어렵사리 국회에 입성한 후 대구 공략에 총력을 다해왔다. 하지만 홍 당선인은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질뿐더러 당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하면서 도전 자체가 무산될 뻔했다. 하지만 당시 공천배제 사태가 홍 당선인의 인지도를 상승시키는 반전의 효과를 가져 온 것일까. 결과는 완승이었다. 홍 당선인은 39% 득표율에 그친 양영모 새누리당 후보를 13.3%포인트 차로 압도했다.
대구 북구을 선거구 홍의락 당선인이 지난 13일 자신의 선거사무소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번 선거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 중 한 곳은 대구 동구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유승민 당선인 캠프였다. 유 당선인은 지난 새누리당 공천과정에서 이른바 ‘배반’의 낙인이 찍히면서 배제됐고, 후보자 등록 막판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 김무성 대표의 이른바 ‘옥새투쟁’ 이후 선거구 자체가 무공천 지역으로 일단락되면서 유 당선인의 승리는 확실시됐다. 더 큰 관심은 유 당선인이 당선소감에서 밝힐 본인의 거취 및 향후 행보였다.
캠프 분위기는 차분했다. 다만 중간 중간 지지자들 사이에선 재밌는 장면이 연출됐다. 선거방송에서 진박계 후보자들이 선전하는 장면이 나오면,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나왔다. 특히 유승민계 후보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결과가 예상될 때마다 그 탄식은 더욱 깊어졌다. 반면 그 반대 결과가 예상되는 선거구가 방송에서 나올 때마다 지지자들은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누군가는 대구 수성갑의 결과가 나왔을 때 야당 정치인 ‘김부겸 파이팅’이란 구호를 외쳐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기도 했다. 여기가 여권 정치인의 캠프인지, 야권 정치인의 캠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유 당선인의 당선소감 발표는 예상 외로 늦어졌다. 이미 개표 시작 얼마 후 당선이 확실시됐지만 유승민계 후보자들이 고전하면서 분위기가 좋지 않은 탓이었다. 당시 선거 캠프 관계자는 “류성걸(대구 동구갑), 권은희(대구 북구갑), 조해진(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후보의 결과가 안 좋아 당선인의 소감 발표가 늦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등장한 유 당선인의 소감 발표는 그간 힘겨웠던 상황, 측근 인사들의 고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 비장함마저 묻어났다.
유 당선인은 이번 결과에 대해 새누리당 지도부를 겨냥한 듯 “대구에서 정치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구에서 일어난 변화를 토대로 정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라고 평하며 “이 준엄한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민께서 보수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보수의 변신을 강조했다.
낙선한 측근 후보자들에 대해선 “마지막까지 했지만, 석패한 분들이 있다. 정말 가슴 아프다”라며 “그분들의 몫도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며 앞으로도 동지로 함께할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유 당선인은 이미 복당을 예고했듯 “당을 떠났지만, 난 단 한 번도 새누리당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다”라며 “당이 처한 어려움이 나의 어려움이다. 당이 갈 길을 고민하겠다”라고 다시 한 번 복당 의사를 밝혔다.
앞서 유 당선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번 대구 총선 결과는 ‘정치혁명’에 가까웠다는 것이 현지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현지에서 만난 한 야권 캠프 관계자는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박 대통령은 사실상 이번 총선의 장막 뒤에서 여당 공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며 “그런 박 대통령과 여당에 대해 텃밭 대구에서 준엄한 심판이 있었던 것이다. 비 새누리당 후보가 무더기로 당선된 것 외에도 그 내용을 봐야 한다. 대구에 출마한 더민주 후보 모두가 일부는 비록 패했어도 모두 두 자리 득표율을 기록했다. 지역주의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총평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