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공 타이밍은 딱 맞췄는데…감독 맘 철옹성은 못 뚫어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10회 연장전에서 대타로 나온 이대호가 끝내기 홈런을 날리면서 ‘인생극장’을 연출했다. AP/연합뉴스
예상대로 텍사스는 왼손 마무리 제이크 디크먼을 마운드에 올렸다. 그런데 대기타석에 있는 선수는 이대호가 아닌 아담 린드였다. 아담 린드는 계속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석을 준비했다. 아담 린드의 차례가 됐을 때 스캇 서비스 감독은 선수 교체를 지시했다. 아담 린드는 들어가고, 대신 이대호가 헬멧을 쓰고 대기타석에 나타났다. 그 순간 경기장은 “대~호”를 외치는 응원으로 하나가 됐다.
2사 1루 상황. 노 볼 투 스트라이크로 카운트가 몰린 상황이었지만 이대호는 3구 연속 빠른공으로 승부하는 디크먼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속 97마일(156km)의 높은 빠른공을 잡아당겨 좌측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만든 것이다. 이대호의 시즌 2호 홈런이자 메이저리그 첫 끝내기 홈런. 시애틀 구단 역사상 서른다섯 살 ‘루키’가 끝내기 홈런을 터트린 건 이대호가 최초의 일이라고 한다.
오클랜드전에서 첫 홈런을 친 이대호가 홈플레이트를 밟으며 환호하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애틀 클럽하우스 안. 천장에선 사이키조명이 반짝거렸고 음악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다. 조명과 음악만 생각하면 영락없는 클럽 분위기였다. 선수들한테 둘러싸여 맥주 세례를 받았던 이대호. 샤워를 하고 기자들이 모여 있는 라커룸 앞으로 다가왔다. 이대호가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렸다가 준비가 됐을 때 폭스스포츠 기자가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모든 투수들을 영상으로만 공부했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공부를 했나. 디크먼 공의 구질에 대해 알고 있었나?”
폭스스포츠 기자는 평균 시속 95마일대의 공을 던지는 제이크 디크먼을 상대로 좌중간 홈런을 터트린 이대호가 어떻게 해서 강속구를 때려낼 수 있게 됐는지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대호는 이에 대해 굉장히 인상적인 대답을 남겼다.
“영상으로만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라도 보고 익혀야지. 10회 대타로 들어가면서 디크먼의 공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빠른공을 던지는 투수다. 1구에 보고, 2구에 타이밍을 맞췄고, 3구에 노린 공을 받아쳤다. 정말 기분이 좋다.”
외신 기자들 중에는 시애틀 이와쿠마와 아오키를 전담하는 일본 기자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들은 한국 취재진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이대호 홈런은 진짜 대단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대호는 한국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선 좀 더 편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했다. 전날 5연패를 당했을 때 기자에게 “연패를 끊으려면 히어로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던 이대호. 그는 그 얘기를 먼저 언급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연패 끊으려면 한 명의 히어로가 나와야 한다고. 그런데 내가 그 히어로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웃음).”
이대호는 홈런 상황에 대해 “대타로 나가서 홈런 칠 거라곤 생각 못했다. 그냥 중심에만 맞히자. 이미 이전 경기에서 상대해본 경험이 있고,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서 가볍게 친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끝내기 홈런보다 팀 5연패를 끊은 게 정말 기분 좋다.”
이대호는 시애틀 홈 개막전(4월 9일)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홈런을, 그리고 ‘오프닝데이 위크’의 마지막 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첫 끝내기 홈런을 생산해냈다.
팀이 연패에 빠져 있을 때 이대호는 현지 기자들로부터 ‘레그킥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강정호처럼 타격할 때 다리를 드는 자세를 놓고 기자들이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이가 ESPN 시애틀 전담 라디오 방송국 섀넌 드레이어 기자였다. 18시즌을 시애틀 매리너스 전담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기자와 개별 인터뷰를 통해 이대호의 타격폼에 문제가 있음을 자주 언급했다.
“난 그가 스프링캠프 중에 스윙하는 모습을 지켜봤었다. 내가 보기엔 그런 타격폼으론 빠른공에 타이밍을 잡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조정해서 잡아가겠지만 첫인상이 그랬다. (다리를) 좀 더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다리를 높이 들면 어떤 투구가 나올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지 않나.”
섀넌 드레이어 기자는 “이대호는 프로다.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 현재의 성적이 타격에서 좋지 않은 부분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도 있다. 그래도 곧 헤쳐 나오리라 믿는다”고 설명했다.
이랬던 그가 14일 이대호의 끝내기 홈런으로 입장이 뒤바뀌었다. 그날 클럽하우스에서 기자를 만난 섀넌 드레이어는 “아까 인터뷰 때 한 말은 취소하겠다. 앞으로 이대호가 발을 더 높이 들고 타격해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며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대호의 현실은 아담 린드의 ‘백업 멤버’. 오른손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면 아담 린드가, 왼손 투수가 등판하면 이대호가 선발로 나온다. 선발로 경기를 뛰다 마운드 상황에 따라 교체 멤버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오프시즌 동안 750만 달러의 계약을 맺고 밀워키에서 시애틀로 트레이드된 아담 린드는 통산 5차례 20홈런을 기록한 강타자다. 그런데 지난해 기록한 20개의 홈런 중에서 왼손 투수를 상대로 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시애틀의 스캇 서비스 감독은 아담 린드를 영입하면서 좌투수를 상대할 오른손 타자를 물색했다. 그 가운데 이대호가 레이더망에 걸려들었고, 치열한 경쟁 끝에 메이저리그 25인 로스터에 이대호의 이름을 올려놓은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감독으로 첫 시즌을 맞고 있는 서비스 감독은 극단적인 플래툰 시스템을 운용하며 비난을 사기도 했다. 팀이 5연패의 침체에 빠졌었고, 주전 아담 린드가 부진을 거듭하자 플래툰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스캇 서비스 감독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팀은 선수를 잘하는 곳에 데려다놓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팀이 이길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지금까지의 메이저리그 성적을 토대로 이 팀에 왔다. 그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거뒀다. 지난해 2할9푼대의 타율(2할7푼7리였다)과 20홈런이 넘는다(홈런 20개). 이대호의 성적이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곳 메이저리그에서의 성적은 전혀 없다. 일본, 한국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이곳에서의 성적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투구가 한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전 리그와는 다른 패턴으로 피칭하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그런 투구에 적응해야 한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일단 시작은 좋았다. 그를 데려온 것에 대해 만족한다. 그가 우리에게 많은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플래툰에 대한 부분은 처음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스캇 서비스 감독은 아담 린드와 이대호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담 린드가 주전이고, 이대호가 아담 린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후보 선수라는 얘기였다.
“(플래툰 시스템은)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다. 제리 디포토 단장과 그 외 많은 이들의 결정을 따른 것이다. 그게 처음부터 세운 계획이었다. 기억하겠지만 우린 아담 린드를 먼저 데려왔다. 그 다음에 오른손 타자를 찾다 보니 이대호가 합류한 것이다. 이 과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됐던 ESPN 전담 리포터 섀넌 드레이어는 플래툰 시스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혔다.
“현재 아담 린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둘 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다. 매일 새로운 투수를 상대하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몇 주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나면 두 선수 모두 잘할 거라 믿는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