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몰라라 하더니 칼 겨누자 고개 ‘푹’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인 박기용 씨가 지난 21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11년 4월 서울 소재 병원에 입원해있던 임산부 4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사인은 알 수 없는 폐 손상이었다. 이후 유사한 증상을 보이던 20여 명의 환자들이 추가로 사망했다. 같은 해 8월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세상에 알려졌다. 사망 원인이 가습기살균제와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중간결과가 나온 것. 사망자들은 동일하게 가습기살균제를 장기간 사용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사용했던 가습기살균제에 폐 손상을 유발할 수 있는 성분인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와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 등이 들어있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5년이 지나도록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판매업체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습기살균제는 물을 자주 갈아 넣는 가습기에 액체 살균제를 넣어 살균과 세척을 쉽게 하기 위한 제품이다. 당시 20여 종의 가습기살균제가 마트 등에서 판매되고 있었고 2011년 사건이 알려지기 전까지 판매된 가습기살균제만 60만 개에 이른다. 특히 피해가 가장 많은 옥시레킷벤키저 제품의 경우 지난 12년 동안 453만 개가 판매됐다. 옥시 제품의 경우 PHMG 성분이 검출됐는데 이는 정화조의 물때를 제거하는데 사용되는 등 건축용 살균제로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PGH 성분 역시 건축용 살균제로 쓰였으며 PHMG 성분보다 독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옥시레킷벤키저의 경우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 겉면에 ‘살균 99.9% 아이에게도 안심,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해 안심하고 쓸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를 적었다.
질병관리본부(질본)는 액체 살균제의 판매 제지를 권고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1년 12월 일반 공산품으로 분류돼 있어 규제가 없던 가습기살균제를 시판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의약외품으로 바꿨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는 없다. 국내에서 그동안 가습제살균제를 구매하고 사용하던 사람들은 800만 명으로 예측된다. 이들 중 일부도 잠정적인 피해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질본은 2014년 3월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폐 손상의 연관성에 대해 1차로 발표했고, 이어 지난해 환경부에서 2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 2차 판정 피해자를 합산한 수치는 각각 530명이고 이중 사망자는 140명이었다. 이어 6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지난 4일까지 집계한 피해자 수는 총 1528명이고 이 중 사망자는 239명이다. 지난해 환경보건센터가 12월 말 정부의 피해자 접수가 중단된 이후 추가 피해자를 집계한 것이다. 또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사망자 가운데 70.5%가 옥시 제품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2012년 8월을 시작으로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 유족 등은 옥시를 비롯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 및 제조한 회사와 회사 대표를 형사고발 및 고소했다. 고발된 회사에는 가습기살균제를 제조 및 판매한 옥시, 애경, 롯데쇼핑, 홈플러스, 세퓨, 신세계 이마트 등과 가습기살균제에 포함돼 있는 독성물질을 공급한 SK케미칼 등이 있다. PGH 성분 역시 가습기살균제 제품 일부에 포함돼 있는 성분이며 해당 제조업체는 현재 폐업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 및 제조업체 가운데 옥시만이 유일하게 지난 19일부터 검찰소환조사를 시작했을 뿐이다. 검찰 조사 이후 옥시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옥시가 살균제의 유해성을 인지하고도 이를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옥시가 압수수색 직전인 지난 2월 제품의 인체 유해성이 적힌 자료를 폐기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에 따르면 옥시는 SK케미칼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폐기했다. SK케미칼이 옥시에 건넨 자료에는 원료를 유해물질로 분류하고 흡입을 금지한 내용이 담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SK케미칼은 옥시가 2001년부터 판매한 살균제인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에 함유된 PHMG 성분을 공급했다. 해당 자료는 SK케미칼을 거쳐 약품 유통업체와 가습기 살균제 제조납품업체, 판매업체 등 순으로 전달됐다.
옥시 측은 검찰에 자사 가습기 살균제가 폐손상 발병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보고서의 실험결과가 조작됐을 것이라는 의혹 역시 커지고 있다. 옥시가 서울대와 호서대에 불리한 증거를 없애기 위해 특정 조건에서만 실험하도록 연구용역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가습기 살균제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서울대, 호서대 등의 교수들 역시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해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들 교수들은 옥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보고서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서울대와 호서대를 제외한 연구기관 서너 곳의 보고서는 첨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연구기관들 역시 옥시 측이 실험을 의뢰한 곳인데 이들 기관의 보고서 중에는 가습기살균제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내용의 보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또 옥시가 자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피해자들의 부작용 호소 글을 무더기로 삭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검찰은 지난 1월 옥시가 자사 홈페이지에 소비자들의 인터넷 게시글을 삭제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이 삭제된 게시글을 복원한 결과, 소비자들이 가슴 통증 등 살균제 사용 후유증을 호소하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옥시 측은 제품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이 올라오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일축해온 것으로 조사됐다.
옥시의 증거인멸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4월 21일 옥시는 “피해자 여러분과 그 가족 분들께 실망과 고통을 안겨드리게 된 점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옥시는 검찰 조사를 받은 뒤 피해 보상 대책과 관련한 입장을 함구한 지 3일 만이다. 2013년 국감 당시 샤시 쉐커라파라 옥시레킷벤키저 대표는 “모든 피해자와 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안타깝고 송구하다”면서도 “제품이 판매될 당시 저희는 안전하다고 믿었다”고 말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또 피해보상금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기금으로 50억 원을 출연하겠다고 말해 보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에 대한 사용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2012년 옥시 등 제조업체에 과징금 5200만 원을 부과했을 뿐이다.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사태 5년째인 지난 4월 19일에야 처음으로 이뤄져 검찰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이 처음 형사 고발한 것은 2012년이다.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강남경찰서에 수사를 맡겼고 3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해가 돼서야 경찰로부터 옥시레킷벤키저 등 8개 업체를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사건을 넘겨받고 수사를 재개했다. 검찰은 보건당국의 역학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태를 지켜보겠다는 이유로 고소 사건 수사를 중지하기도 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롯데마트와 홈플러스 등이 피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롯데마트는 검찰 수사가 종결되기 전까지 피해보상 전담 조직을 설치하고 피해 보상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지난 4월 18일 밝혔다. 롯데마트 측은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발생한 이후 피해 원인 규명 등에 대한 조치가 미진한 부분을 인정하고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며 “피해 보상 담당 조직, 재원 등을 미리 마련해 피해 보상에 즉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약속한다. 관련 보상 재원으로 100억 원 정도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 유족들은 검찰 수사를 앞두고 급작스럽게 진행한 진정성 없는 사과와 대책이라며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70.5%가 옥시 제품을 사용했다. 사진제공=환경보건시민센터
피해자 유족들은 옥시 등 업체들의 살인죄 기소를 주장하고 있다. 제품의 위험 가능성을 알고도 판매했다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유해성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제품을 판매했다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를 넘어 살인죄 적용도 배제할 순 없다는 시각도 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진상규명과 처벌을 위해 1인 시위와 불매운동 등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
피해자들 국제소송 나서…옥시 영국 본사 ‘형사처벌’ 가능할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옥시의 모회사인 영국 레킷벤키저 본사를 상대로 영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6월 피해자 두 명과 사망자 한 명의 가족이 소송에 참여하기로 했고 다른 다섯 명도 참여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들은 지난해 항의를 위해 레킷벤키저 본사에 찾아가 시위 및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당시 이들은 “소비자를 죽이고 다치게 한 다국적 기업의 본사에 책임을 묻기 위해 소송참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영국 법정변호사인 크리시넨두 무커지가 피해자들의 법정 대리인을 맡게 됐다. 무커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레킷벤키저 본사 측에 소송을 내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냈고 레킷벤키저는 한국 지사와 영국 본사가 법적으로 별개의 존재이며 독립적인 회사라는 답이 왔다”며 “하지만 영국의 레킷벤키저 본사는 한국의 옥시레킷벤키저 지분을 100% 갖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2001년 레킷벤키저가 옥시를 인수한 이후 옥시레킷벤키저가 기업활동을 하면서 얻은 모든 이윤은 영국 본사로 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2007년 ‘기업과실치사법’을 제정해 2008년 4월부터 시행했다. 기업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기존 법리를 깨고 기업을 처벌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법을 만들어 산업현장에서의 사망사고는 물론 일반 대중을 사망하게 한 경우 기업을 형사처벌하는 것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해 피해자 유족들의 항의방문을 보도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2014년에 21억 3000만 파운드(3조 7000억 원)의 이익을 낸 영국기업 레킷벤키저가 한국에서 겨울철마다 800만 명이 사용하는 가습기살균제 시장을 1위로 점유했는데 피해자의 80%가 영국회사 제품을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최] |
제2의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없다? 가습기살균제 사태 이후 2013년 5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이는 지난해부터 시행됐다. 이 법은 화학물질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도록 하며, 아직 위험이 파악되지 않은 물질의 사용을 차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전부터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유럽연합(EU)은 2007년부터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인 리치(REACH·Registration, Evaluation, Authorization and Restriction of Chemicals)를 실시해 왔다. 화학물질의 등록, 평가, 허용 및 규제에 관한 규정으로 발암 물질, 독성 물질 등이 포함된 화학제품에 대한 규제를 뜻한다.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