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날 불사른다 작은 눈 ‘반짝’
이봉주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봉달이, 베이징 코스를 밟다’를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주]
8월 20일 오전 9시 10분 인천공항. “왔어?” 원래 말수가 적은 이봉주의 인사는 늘 이런 식이다. 때로는 ‘씨익’ 웃기만 할 뿐 두 음절마저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서운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방송인 박명수와 쌍벽을 이루는 ‘인조 쌍거풀’에서 나오는 선하디 선한 눈웃음은 이봉주의 최고 매력이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아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인 마라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의미있는 여정이었지만 이봉주는 참 편안해 보였다. 세 차례의 올림픽 출전과 두 차례 아시안게임 우승, 그리고 보스턴 우승 등 37회(완주는 35회)나 풀코스에 도전한 관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1시 45분에 출발해 2시간을 날아 베이징에 도착했다. 시차 때문에 12시 45분. 베이징의 공기는 덥고 축축했다. 그리고 매연 때문에 들이 마시고 싶지 않을 정도로 더러웠다. 한참을 기다린 후 택시 두 대에 나눠 타고 숙소인 쿤룽호텔로 향했다. 먼저 출발한 오인환 삼성전자육상단 감독과 필자는 현대자동차의 신형차를 만난 덕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쾌적하게 이동했지만 이봉주와 여자 마라토너 이은정, 그리고 조덕호 사무국장은 하필이면 에어컨이 고장난 노후된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내리던 이봉주 왈, “우리 매연 다 마시면서 왔어(웃음).”
20일 오후 4시.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이봉주는 11년 후배 이은정과 함께 호텔 인근의 차오양공원으로 훈련을 나갔다. 한 시간이나 쉬었을까. 오자자마 뛰는 셈이었다. 매연을 피해 그나마 공기가 좋은 공원을 택했는데 말이 인근이지 일반인은 걸어서 무려 30분 거리였다. 30℃를 훌쩍 넘는 더운 날씨 속에 이봉주는 한 시간이 넘도록 ‘가볍게’ 훈련을 했다. 도착하자마자 너무 세게 훈련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오인환 감독은 “이 정도는 운동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봉주도 “날씨가 좀 덥네”라는 짤막한 소감뿐이었다. 이후 답사단은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왕징(望京)의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쳤다.
참, 알고보니 이봉주에게 베이징은 의외로 낯설었다. 못해도 3~4회는 왔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02년 10월 삼성이 후원한 베이징마라톤에 참관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잠시 방문한 것이 유일했다.
문제점도 있었다. 베이징올림픽조직위원회(보콕·BOCOG)는 성의가 없었다. 이봉주와 같은 수준의 선수가 답사를 할 경우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는 게 보통이다. 무명이었던 애틀랜타 때는 그렇다쳐도 시드니나 아테네올림픽 때는 제대로 협조를 받았다. 하지만 삼성전자육상단과 올림픽 파트너인 삼성전자 측이 여러 루트를 통해 수차례 협조 요청을 했는데도 보콕과 중국체육총국은 이번 답사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 매연과 교통체증이 심한데 당국의 협조 없이 24일 본격적인 답사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됐다. 원래 계획한 코스 답사는 남자마라톤 스타트 시간의 꼭 1년 전인 24일 오전 7시 30분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한 오인환 감독이 급히 재중 대한체육회의 협조를 얻어 21일부터 답사를 하기로 했다.
21일 오전 8시 30분.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이봉주가 인천공항에서 사왔다며 일행에게 김을 내놓았다. 식사 중 물어보니 이봉주는 새벽에 일어나 이미 한 시간가량 운동을 한 상태였다. 그새 또 뛴 것이다. 한 시간이면 못해도 10~15㎞, 빨리 뛰면 20㎞까지 달린다. 어디를 가든 새벽과 오후에 두 차례씩 하루 두 시간은 달리니 본격적인 훈련이 아닌 답사훈련인데 하루에 30㎞를 뛰는 셈이다. 정말이지 많이 뛰는 것이다.
식사시간을 전후로 오인환 감독이 조덕호 사무국장과 함께 계측기를 들고 기온과 습도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남자 마라톤 경기가 아침에 일찍 열리는 까닭에 이 시간대 베이징 날씨가 중요한 것이다. 오 감독은 “오전 7시 30분에 벌써 27℃다. 생각보다 더 덥다. 마라톤에서는 20℃가 넘으면 좋은 기록이 나오기 힘들다. 봉주가 고생 좀 할 것 같다. 더위 적응에 대한 훈련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아침식사를 하며 자세히 보니 이봉주의 턱수염이 제법 길어졌다. 마라톤은 보통 레이스 3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한다. 이봉주는 평상시에는 턱수염을 기르지 않지만 레이스 계획이 잡히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다. 인간의 극한에 도전하는 힘든 운동인 만큼 거울을 볼 때마다 수염을 보면서 스스로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턱수염은 10~11월께 시카고나 뉴욕마라톤 둘 중 하나에 출전할 것임을 말해주는 의미다.
▲ 베이징 주경기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마라톤 코스 답사단. 왼쪽부터 유병철 위원, 이봉주, 오인환 감독, 이은정. | ||
왕징의 한식당에서 점심식사 후 오후 2시께부터 올림픽코스 지도 한 장을 들고 일행은 차량 답사에 나섰다. 드디어 이봉주가 마라톤 인생의 마지막을 불사를 운명의 현장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다. 차량 답사는 실제 뛰지는 않고 차량으로 코스를 이동하면서 중간 중간 내려 주요 정보를 체크한다.
출발지점인 자금성 앞 톈안먼 광장이 가까워지자 그렇지 않아도 말이 없는 이봉주가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눈빛을 반짝이며 이곳저곳을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홀짝제가 풀린 첫 날로 차량이 워낙 많은 까닭에 스타트 지점은 차안에서만 정보를 파악한 후 20㎞ 지점까지 계속 이동했다.
옆자리에 앉은 이봉주에게 “어때?”하고 슬쩍 질문을 던져보니 “도로가 정말 넓다. 그리고 건물들이 좀 단조롭네”라는 대답이 나왔다. 역시 말수가 없기로 유명한 이은정이 이 대목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해설을 덧붙였다. “이렇게 넓은 도로에서 혼자 뛰면 마치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아요. 무조건 선두권으로 따라 붙어가야 해요.” 한국 여자 장거리의 모든 한국기록을 갖고 있고, 마라톤도 한국기록과 불과 5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선수가 ‘제자리걸음’이라는 표현을 쓰니 웃음이 나왔다. “주변을 잘 봐 두라”는 오 감독의 주문이 있기 전부터 이봉주의 시선은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자신이 달릴 코스를 머릿속에 담아두느라 바빴다.
“저 뾰족한 탑은 뭐야?” “여기서 좌회전이지?” 이봉주가 먼저 입을 여는 횟수도 많아졌다.
20㎞ 지점과 25~31㎞ 지점인 베이징대와 칭화대에서 각각 하차해 사진도 찍고 주변상황을 체크했다. 20㎞ 지점에서는 표고차를 보기 위해 이봉주가 옆에 버스가 지나가는데도 땅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세밀하게 관찰해 웃음을 사기도 했다. “너 골프 퍼팅하냐?”는 오인환 감독의 농담에 “퍼팅보다 이게 더 중요하잖아요”라는 멋진 응수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