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내 운명, 방황 속에서 깨달았죠
▲ ‘기록제조기’로 잘나가던 어느 순간 부진에 빠졌고 홀로 방황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마라톤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한국 여자 장거리 기록 제조기’란 타이틀을 안고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이은정(26·삼성전자). 대회만 나가면 신기록을 세우는 바람에 영광스런 별명을 얻게 됐지만 정작 그 자신은 ‘기록 제조기’란 타이틀이 너무나 버거웠다고 한다. 결국 2005년 11월 도쿄국제마라톤대회에서 복통으로 중도에 기권한 이후 오랫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잠시 사람들 눈에서 사라지기도 했던 그가 절치부심 끝에 지난 11월 4일 중앙서울마라톤에서 2시간29분32초를 기록하며 재기의 신호탄을 쏘았다.
부침이 많았던 시간만큼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직접 만나본 이은정은 예상외로 엉뚱했고 기대 이상으로 마라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봉달 오빠와 닮았다구요?
먼저 기자의 내뱉은 ‘이봉주 닮은 꼴’에 대해 이은정은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열한 살 이상 차이나는 대선배와 비슷해 보인다는 게 결코(?) 기분 좋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면. 사실 외모가 비슷한 게 아니라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환한 웃음 때문이란 설명에 그제야 조금은 마음이 풀린 듯하다.
중앙마라톤대회가 끝난 후 일주일 휴가를 받은 이은정은 19일부터 경주역전마라톤대회에 출전한다. 인터뷰를 휴가 중에 한 셈인데 다행히 집에서 쉬고 있다가 대회 준비차 잠시 숙소에 들른 게 기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원래 휴가 때는 안 뛰어요. 쉴 때는 푹 쉬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뛰는 걸 싫어하는데 어제 숙소 왔다가 오늘 새벽 훈련을 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란 게 (이)봉주 오빠도 뛰고 있는 거예요. 오빠도 휴가 중이거든요. 저야 다음 주 대회라도 있지 그 오빠는 아무 것도 없는데 휴가 때 나와서 훈련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어요.”
이은정은 2008베이징올림픽을 마라톤 인생의 마지막 레이스로 정한 이봉주의 엄청난 훈련량에 남다른 경외심을 표현했다.
“정말 성실한 분이에요. 전 게으르고 휴식을 핑계 삼아 달리기를 쉴 때도 있는 반면에 오빠는 달리기에서만큼은 전혀 그런 게 없어요.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아, 정말 운동에 목숨 걸었구나’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뭐 이런 생각들이 들어요. 오빠를 보고 있으면.”
▶▶뛸 때는 아무 생각 안 나요
이은정이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뛰면서 무슨 생각하세요’라고 한다. 그래서 똑같이 물었다. 뛰면서 무슨 생각 하느냐고.
“어떻게 다른 생각이 날 수 있겠어요. 몸이 고통스러워지는데…. 내 몸이 힘들어지고 있는지, 호흡하기가 괜찮은지, 훈련한 대로 잘 풀어가고 있는지, 뭐 이런 생각들이 주종을 이루죠.”
▲ 지난 4일 중앙서울마라톤에서 재기를 알린 이은정. 사진제공=중앙일보 | ||
“저한테도 신문 기사 쓰라고 하면 3박4일 걸릴 걸요? 마찬가지잖아요. 각자의 달란트(각자의 타고난 자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있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해온 운동이고 지금은 월급 받으면서 운동하는 건데 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전 마라톤을 하면서 완주했다는, 기록을 경신했다는 희열보다 고통을 참아냈다는 희열이 훨씬 커요.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는데요. 주로 포기하고 싶은 유혹들이 대부분이죠. 그런 갈등을 극복하고 이겨냈다는 게 정말 큰 행복감을 안겨 줘요.”
▶▶‘혼자만의 여행’ 떠났다
이은정은 2005년 도쿄마라톤대회 이전까지만 해도 5000m, 1만m, 하프마라톤에서 모두 5차례의 한국 기록을 갈아치우며 ‘그랜드 슬램’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 그해 말 도쿄국제여자마라톤에서 기권한 이후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2006년 4월 부상과 피로 누적 등의 이유로 전주국제마라톤을 포기한 뒤론 무성한 추측과 소문 속에서 방황을 거듭하다가 잠시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오인환 감독님께 휴가를 달라고 해서 집에 가 있었어요. 아무리 훈련을 해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만족감을 얻지 못하니까 스트레스만 쌓이더라구요. 그런데 갑자기 저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한테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고 집을 나왔어요.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는데 막상 집을 나오니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제 마음을 편하게 하더라구요. 운동하기가 싫었습니다. 스트레스 받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싫었고. 강원도 등지를 돌며 산도 탔고 바다도 보러 다녔어요. 그렇게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녔는데 결국 감독님 레이더망에 걸리더라구요.”
부모님의 걱정, 황당해 할 소속팀의 반응, 호기심 어린 후배들의 시선 등등 전혀 와 닿지가 않았다. 무조건 모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돼요. 평소 제 성격대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당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던 게 다시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한창 ‘기록 제조기’란 수식어를 안고 앞만 보고 달리다가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느낌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이은정은 당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 많이 힘들어 했다. 안에 담아 두려했던 부분을 굳이 꺼내서 설명해 달라는 짓궂은 기자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어려워했다. 미안할 따름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소속팀으로 복귀하기 전 병원을 다니며 우울증 치료를 받은 이은정은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자신이 행한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했던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방황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빨리 재기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더라구요”하면서 말이다.
▶▶“나도 즐기며 하고 싶다”
쉬는 동안 10kg 이상 체중이 늘어난 이은정은 팀에 합류한 뒤 체중 조절을 하느라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봐도 놀랄 정도였다고.
▲ 헛둘 헛둘 이은정이 사진기자를 위해 몸 푸는 동작을 간단히 보여주었다. | ||
이은정은 재기를 준비하면서 과거의 기록이나 영화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전 한국 마라톤 ‘퀸’의 입장에선 중앙마라톤대회에서 올린 2시간29분32초의 기록이 별 볼 일 없는 숫자라고 무시했겠지만 재기가 힘들었던 것만큼 지금의 기록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저없이 과거보단 지금이 몇 만 배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은정은 의외로 예민한 편이었다. 초등학생도 들고 다니는 휴대폰도 소지하지 않고 다닌다. 있긴 하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방에 놓고 다니기 일쑤라는 것. 가장 큰 이유가 사생활 침해 때문이다. 쉬고 싶을 때 자고 싶을 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벨이 울려대는 바람에 휴식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라고.
지금 상태라면 독신으로 살 것 같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1%도 없고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자신을 챙기기에도 바쁘고 운동 외적인 일에 감정을 허비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운동은 서른한두 살까지만 하고 그만둘 것이며 은퇴 후엔 운동과 관련 없는 새로운 인생에 도전해보겠다는 야무진 꿈도 갖고 있다.
“전 지도자 스타일이 아니에요. 리더십도 없고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실력도 안 되구요. 제가 세운 목표를 이루면 마라톤을 통해 이룰 걸 다 이뤘다고 생각해요. 무슨 목표냐구요? (웃으면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겠다는 그런 거창한 목표는 아니구요 아직 한국 여자 마라톤에서 이루지 못한 2시간23분, 24분대에 진입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엉뚱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이 굉장히 강건한 스타일이었다. 환한 미소 속에, 온화한 표정 속에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은정만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1997년 권은주가 세운 2시간26분12초가 한국여자마라톤의 최고 기록이다. 10년이 넘었는데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은정은 이 부분에 대해 마치 오래된 ‘부채’를 안고 있는 심정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기자가 가급적 ‘부담을 덜고 즐기면서 운동하라’는 상투적인 멘트를 내뱉었더니 눈을 반짝거리며 “즐기면서 운동하는 법을 진짜 배우고 싶다”며 얼굴을 들이민다. 박찬호, 박세리, 박지성…. ‘스리 박’이 인터뷰 때마다 자주했던 말이라고 덧붙이자 “에이, 난 또…”하며 금세 실망한 표정이다.
“운동하는 걸 즐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아마 득도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할까요? 나중에 그분들(‘스리 박’) 만나면 꼭 물어봐주세요. 어떻게 즐기면서 운동할 수 있는지를….”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