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대선 어떤 세력도 독자적 집권은 불가능”
<일요신문>은 정의화 국회의장이 퇴임 기자회견을 하던 5월 25일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을 집무실에서 만났다. 박 사무총장은 이명박 정권 개국공신으로 불리는 정치인이다. 박 사무총장은 지난 2007년 대선 과정에서 MB 캠프 선거 운동을 총괄했던 이른바 ‘실무회의팀’ 핵심 멤버다. 그 후 박 사무총장은 인수위에서 정권 기초를 설계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또 청와대 홍보기획관과 정무수석을 거쳤다. 지난 1월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박 사무총장은 여전히 주요 정치세력의 영입 대상 ‘영순위’로 꼽힌다. 향후 정계개편의 ‘키맨’ 중 한 명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방한으로 새누리당 내분사태가 잠잠해지고 있다.
“수면 아래로 내려갔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론 갈등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총선 결과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다는 점이다. 정확한 진단 위에서 무엇을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 처방이 나온다. 처방이 나와도 치료약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정도로 총체적인 위기다.”
―정진석 원내대표의 최근 당 내분 사태수습에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
“개인 리더십 문제가 아니다. 청와대 관계를 비롯한 당 안팎의 역학구도가 리더십 발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계파를 초월해 당을 이끌려고 했지만 초반부터 브레이크에 걸려 늪에 빠져버렸다. 늪이 워낙 깊기 때문에 헤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돌파형 리더십이 절실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추상적인 노력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새누리당 주류는 무색무취의 혁신비대위원장-친박 당 대표-반기문 대선 후보라는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는 얘기가 많다.
“보수층 55% 중 30%만 잡고 나머지는 모두 잃을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핵심지지층 결집은 가능할지 몰라도 20~25%의 중도보수층은 안을 수 없다. 경고가 빗발치는데도 친박 중심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고 유연성과 포용력은 오간 데 없이 오히려 관성과 패권이 강화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후보를 내세우기도 어렵고, 설사 어떤 후보를 내세워도 우리나라 보수 지대에 있는 55%를 결코 커버할 수 없다.”
―친박 패권주의의 중심에 대통령이 있는 것 아닌가.
“중심에 있었지만 지금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은 실제 박 대통령 중심의 선거였다. 정치학에서 여왕벌 현상이라고 한다. 미래 권력에 대한 국민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은 대통령이 중심에 서려고 했지만 도리어 심판을 받았다. 대통령이 친박을 중심으로 차기 정권 창출을 주도할 것 같지만 주관적 의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친박이 지원하는 반기문 총장의 바람이 거세다.
“반 총장이 국민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기에 부합하는 정치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국정 운영능력을 얼마나 갖추었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반 총장이 친박 패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새누리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왔을 때 얼마나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반 총장 지지층이 더 줄어들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로,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로 중도를 끌어안았다. 친박에 기대면서 중도층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낭만적이다. 현재 지형에서 반 총장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
박형준 사무총장.
―정치판이 대선국면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정의화 국회의장, 박형준 사무총장이 ‘새한국의 비전’이라는 싱크탱크를 출범시켰다.
“대통령을 하려는 사람, 대통령을 만들려는 세력은 많은데 집권 이후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년 단임 대통령제가 반복적으로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권력만 잡으면 끝’이라는 구조 때문이다. 누가 정권을 잡든 국정운영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새한국의 비전’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대선 국면에서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의 창조적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만들어지고 세력 간 협력과 연대가 필요할 때 ‘새한국의 비전’이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다.”
―총론에 공감하지만 결국 새누리당 이탈세력을 받아들이는 공간이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그렇지 않다. 분명한 것은 지금 새누리당의 가치와 비전으로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을 위해 문제의 핵심을 진단하고, 혁신과제를 뽑아내고,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사람은 새누리당 이탈자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자들이다. 이들이 세력을 형성해 미래지향적인 정치결사체를 만들겠다고 하면 그것을 정치발전이라고 불러야 한다.”
―주도적으로 보수혁신에 나서겠다는 ‘새한국의 비전’이 그런 세력을 모아낼 수 있을까.
“확신을 갖고 밀어붙일 것이다. 당위론적으로 보수 내에서 20석 이상의 국회 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의 중도, 개혁보수정당이 나와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그런 기운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새한국의 비전’이 정당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중도개혁정당을 위해 바탕을 깔고, 인프라를 구축하며 콘텐츠를 공급하는 지원군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국민의당이 진보세력 내부의 분화를 통해 중도확장에 성공한 것과 비슷한 형태인가.
“거대 기득권 양당구조의 폐해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제3정당을 만들었다. 하지만 반쪽의 성공이었다. 보수 쪽에서도 이런 요구가 점점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새한국의 비전‘은 몇 개월의 모색기간을 거쳐 어떤 방향이 최선인지 결정할 것이다.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새누리당과 대한민국의 혁신과제를 얘기하고 지속적으로 대안을 찾아갈 것이다. 머지않아 여건이 무르익을 것이다.”
―87년 체제의 한계로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이 필요하다는 국민 공감대가 높지만 역시 사람과 세력이 문제다.
“새누리당 남경필 지사, 오세훈 전 시장, 원희룡 지사, 나경원 의원 등은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정치지도자들이다. 높은 대중적 인지도에 시대적 고민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50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남경필 지사는 그나마 연합의 정치 틀을 가지고 새로운 실험을 해오고 있지만 혼자 힘으로 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다. 앞으로 펼쳐지는 정치는 개인적 카리스마로 집권에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내년 대선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동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그런 면에서 잠재적 대선후보들은 각자 움직일 게 아니라 다양한 채널에서 시대적 고민을 함께 나누는 협력 속 경쟁에 익숙해져야 한다.”
―언급한 정치인들이 나름대로 인기는 좋지만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약하다.
“처해있는 환경이 발언을 제약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할 때다. 누구를 비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소명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면 무엇을 내려놓을지 말해야 한다. 당내 소장파로서 그나마 튀면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키워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책임이 더욱 더 있다.”
―이런 얘기를 직접 하는가.
“최근에 한 분씩 만나면서 분명하게 얘기했다. ‘이제 당신이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 리더다.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이끌고 비전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웰빙정당이라고 비판을 받아오면서 새누리당 위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지켜볼 것이다.”
―‘새한국의 비전’ 이사장을 맡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다.
“스스로 대권(大權)이 아니라 대국(大國)을 위해 길을 걷겠다고 했다. 의지와 열정, 초심에 대해 나무랄 게 없는 정치인이다. 대통령은 개인의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좋은 정권 만들기에 매진할 것이다. 대권 때문에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정치인 정의화에 대한 너무 좁은 해석이다. 선수로 뛰지 않고 훌륭한 코치를 하겠다는 생각이 분명히 있다.”
―궁극적으로 개혁적 보수 제4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새누리당에서 분화하는 것인가.
“연구소가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으로 출발한다. 정당이 되려면 다양한 사람의 토론과 논의가 필요한데 연구소는 소통과 협력의 촉매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중도 정당이 만들어지려면 자연스럽게 새누리당의 분화가 일어날 것이다. 오는 11월이면 새로운 세력의 등장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결국 내년 대통령선거가 양자 또는 3자 구도가 아니라 다자 구도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몇 명이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대선까지 이런 모습을 그대로 가져간다고 보지 않는다. 상상을 뛰어넘는 여러 가지 변화 가능성이 있다. 후보는 많아지고 정당 간 경계는 상당히 느슨해질 것이다. 세력과 집단의 이합집산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질 것이다. 창조적 파괴와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떤 세력도 독자적으로 집권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정계개편을 통한 연대와 협력의 정치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전계완 정치평론가 jkw6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