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과 대립각 세우며 존재감 부각, 당권 도전설 솔솔…“지금은 포지셔닝 고민하며 기다릴 때”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윤석열 정부 집권 초기 법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며 ‘에이스 국무위원’으로 주목 받았다. 김기현 전 대표가 당권을 내려놓은 뒤 9회말 2아웃 구원투수로 등판해 총선을 지휘했다. 총선 결과는 참패였다. 그러나 여권 내에선 ‘책임론’ 방향성이 엇갈린다. 한 전 위원장이 잘못했다는 ‘한동훈 책임론’과 낮은 대통령 지지율에도 그나마 한 전 위원장이 선방했다는 ‘대통령 책임론’이 공존하는 기류가 포착되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집권여당에서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차기 주자는 1인자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야 대권을 노릴 수 있다”며 “특히 지금은 대통령 지지율이 높지 않기 때문에 보수진영에서 차기 주자로 발돋움하려면 윤석열 대통령과 얼마나 차별성을 가지느냐로 존재감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은 검찰 선후배 관계다. 보통 선후배가 아니다. 검사 시절 윤 대통령에게 가장 신뢰받는 후배 중 하나가 한 전 위원장이었고, 그런 신뢰는 정치권에 옮겨와서도 이어졌다. 한 전 위원장이 여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한 것도 윤 대통령이 한 전 위원장을 중용했기 때문이다.
여권에 따르면 한 전 위원장이 비대위원장을 맡기 직전까지 대통령실 내부는 상당한 딜레마에 시달렸다는 후문이다. 한동훈 비대위 체제 하에서 총선을 이기든 지든, 윤 대통령의 레임덕은 불가피하다는 전망 때문이었다.
여권 한 관계자는 “한동훈을 비대위원장으로 기용해 총선에 승리하면 차기 주자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대통령실 그립감이 떨어진다. 반대로 총선에서 지면 윤석열 정부가 중간고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야당에게 주도권을 주는 그림이 되기 때문에 당시로선 상당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그럼에도 대통령실은 한동훈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며 “국민의힘 혁신위가 친윤 중진들과 내홍을 겪으며 정당 지지율과 대통령 지지율 모두가 하락 추세를 탔었던 까닭”이라고 했다. 그는 “9회말 2아웃 상황에 등판한 구원투수 격이었던 한 전 위원장은 사실상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뼈아픈 패배를 맛봐야 했다”고 덧붙였다.
총선이라는 큰 이벤트가 야당 압승으로 마무리됐다. 대통령실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등 인사 쇄신을 단행했다. 이제 관심은 패전투수가 된 한 전 위원장 재등판 여부에 쏠렸다. 총선 이후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묘한 거리두기에 나선 것.
대통령실은 4월 19일 한 전 위원장에 윤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의 오찬 회동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 전 위원장은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기 어렵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최근 국민의힘 내부에 따르면 4월 16일 한 전 위원장이 총선을 함께 뛴 비대위원들과 따로 만찬을 가졌다. 이날 만찬은 4월 11일 비대위원장 직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하던 한 전 위원장 첫 일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선 선거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 등과 관련한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 일각에선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오찬은 거절하고, 비대위원들과 만찬 자리를 가진 것과 관련해 ‘윤-한 갈등’ 연장선이 아니냐는 시선을 제기하고 있다. 한 전 위원장을 둘러싼 당권 도전설도 돈다.
국민의힘 내부 관계자는 “여권 차기 주자 중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과, ‘칩거’가 지속되면 존재감이 희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한 전 위원장이 총선 참패를 딛고 일어나 당권에 도전하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한 전 위원장이 정말 윤 대통령과 대립각을 완연하게 세울 수 있을지, 총선 과정서 드러낸 아쉬운 정치력을 보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부호는 달려 있다”고 부연했다.
국민의힘 또 다른 관계자는 “한 전 위원장은 총선 부산 유세 중 친윤계로 분류되는 장예찬 후보가 무소속 출마한 부산 수영 지역구만 가지 않으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 바 있다”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한 전 위원장이 윤 대통령과 거리는 두되 완전한 대립각을 세우는 데엔 조금 소극적인 경향이 있었다”며 “이제는 정말 대립각을 세우든, 휴식을 취하든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경율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은 4월 15일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한 전 위원장이) 본인 의지를 떠나 정치 권역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면서도 “이번 당대표 선거에 뛰어들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거로 본다”고 전망했다.
윤 대통령과 오찬 회동이 성사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서는 4월 2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를 통해 “한 전 위원장이 아무리 지금 백수 상태지만 금요일에 전화해서 월요일 오찬을 정하기로 했다는 부분은 이해가 안 된다”며 “한 전 위원장이 총선 과정에서 많이 소진돼 육체적으로 힘든 상태인 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4월 21일 자신의 SNS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한 전 위원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인이 배신하지 않아야 할 대상은 국민뿐”이라고 강조했다. 한 전 위원장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배신이 아니라 용기”라고 했다. 또한 “정교하고 박력 있는 리더십이 국민 이해와 지지를 만날 때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며 “정교해지기 위해 시간을 가지고 공부하고 성찰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치평론가 최수영 디아이덴티티 메시지전략연구소장은 “보수진영 어떤 차기 주자든 지금은 차분하게 정체성과 지지기반을 어떻게 포지셔닝할지 고민할 때”라며 “제22대 국회가 개원하면 2025년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당권을 계속 잡을지 여부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입법 주도권을 야당이 원사이드하게 가져가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최 소장은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앞으로 보수 대권주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화두로 던져질 때가 있을 것”이라며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역시 당장 당권을 노리기보다는 기다려야 한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