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공사’하는 재미가 쏠쏠 합니다
“이젠 포기했어요. 강원도로 오니까 더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처음엔 우리집 아이들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마음 편히 가지려고요. 별명은 별명일 ‘뿐’이고….”
FC서울에 있을 때만 해도 이을용은 ‘을용타’ ‘인민군’ ‘귀순용사’ 등 자신을 지칭하는 별명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멀쩡한 사람을 이상하게 희화시켰다며 발끈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강원FC로 옮긴 후 그의 별명은 물 만난 고기처럼 더 자주 등장했다. 강원도라는 연고지의 특징 때문. 결국 이을용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강원도의 힘’ ‘꽃보다 감자’ 등 연고와 관련된 수식어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서른넷의 나이에 서울팀을 떠나 고향으로, 그것도 창단팀에서 또 다른 축구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이을용은 지금 생활에 굉장히 만족한다고 말했다. 흔히 하는 ‘방송용 멘트’가 절대 아니었다. 대학팀, 실업팀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는 신생팀에서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정말 갑갑했어요. 애들 정신 상태가 전혀 프로선수답지 않았거든요. 프로팀 선수가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더라고요. (정)경호가 합류하면서 조금씩 정리가 됐는데 시즌 개막 전까지도 ‘과연 얘네들이 잘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몸 관리나 사생활 등 프로선수로서 기본적인 부분들이 지켜지지 않으면 힘들잖아요. 제주랑 첫 경기를 치르고 나니까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내가 잔소리처럼 했던 말들이 실감이 났던 거죠.”
지난 8일, 강릉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강원FC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개막 첫 경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큰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상 최초로 신생팀의 개막전 홈구장 승리에다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은 강원FC 팬들이 스탠드를 가득 메웠고 표는 완전 매진된 데다 휴지를 던지고 봉을 두드리는 등 열광적인 응원전을 펼쳤던 것이다.
▲ 강원FC의 든든한 두 주춧돌인 이을용(오른쪽)과 정경호가 팬사인회에 앞서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여기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FC서울도 팬들이 많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아요. 오히려 더 뜨겁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선수들이 이제야 자신이 프로라는 사실을 실감한 것 같아요. 개막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던 것도 팬들의 관심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거든요. 동계훈련과 전지훈련 등을 갖는 동안 걱정이 한가득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들을 훌훌 털어 버렸어요.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무조건 강원FC를 지지하겠다는 팬들이 있는 이상 축구 선수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운 거죠.”
FC서울에서 주장을 맡았던 이을용은 신생팀에서도 완장을 찼다. 이전 팀에선 선수들에게 ‘버럭 을용’으로 불릴 정도로 호통과 잔소리를 달고 살았다면 지금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들에게 살갑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팀 분위기 자체가 딱딱하고 근엄한 걸 싫어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큰소리치면 선수들이 주눅들 걸요? 그래서 자유스러운 생활을 존중하면서 선수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가이드해주는 편이에요. FC서울에선 자존심 센 젊은 선수들을 데리고 성적을 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여기선 팀을 밑바닥부터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해요.”
▲ 지난 8일 강릉종합운동장에서 열린 K-리그 개막식에서 이을용이 드리블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우리 선수들한테 이청용, 기성용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이에요. 청용이랑 성용이도 어린 나이에 프로 들어와서 고생 많이 했고 2군에서 2~3년씩 버티며 처절한 노력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거라고요. FC서울은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서 어린 선수들이 기회를 잡기가 어렵지만 강원FC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팀이니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꼭 잡으라고 조언도 해주죠.”
FC서울을 떠나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이전의 인터뷰에서 FC서울과 재계약하지 않을 경우 호주나 미국 등의 프로팀에서 플레잉코치를 하며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밝혔던 내용을 끄집어냈더니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호주로 갈 뻔했었죠. 에이전트가 다리를 놔 줬거든요. 그런데 강원도 팀이 창단되면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처음에 여기 올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가봤자 고생할 게 뻔한데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겠어요. 더욱이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고 연봉도 많이 받지 못할 것이고, 뭐 하나 좋은 게 없을 것 같았죠. 그런데 신생팀이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며 공부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FC서울에선 처음에 만류했었고 귀네슈 감독 또한 날 보내고 싶어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고향팀인 데다 창단팀이라 보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아내가 반대했더라면 못 왔을 거예요.”
이을용의 아내 이숙 씨는 축구계에서도 내조 잘하는 아내로 소문 나 있다. 세 아이(아들 2 딸 1명)를 키우면서도 남편의 잦은 부재에 대해 절대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뿐더러 이을용이 강원FC로 이적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3년 동안 남편 없는 셈 치지 뭐’하며 쿨하게 허락했다는 것. 연봉을 구단에 백지위임한 남편에게 타박보다는 ‘잘했다’는 격려를 보내며 응원을 보낼 만큼 화통한 성격이다.
“조용히 축구에만 전념하고 싶은데 고향팀에 있어서 그런지 선후배들 전화가 폭주해요. 소주 한잔 하자는 전화도 많고. 그런데 먹고 싶어도 못 나가요. 도민들 대부분이 팬인데 이상하게 소문날 수도 있을 것 같고. 축구를 시작한 곳도 여기고 그 마무리도 여기서 하게 됐어요. 고생한 만큼 얻는 게 많을 거라고 봐요.”
인터뷰를 서둘러 마치고 곧장 강릉시청에서 열린 팬 사인회로 이동한 이을용은 경기 외적인 행사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질문에 “팬들이 많이 찾아오신다면 이런 일은 힘든 것도 아니다”라며 열린 마음으로 팬들을 직접 만났다. 이을용 옆에서 환한 얼굴로 팬들과 사진을 찍는 정경호를 보면서 강원FC 김원동 사장에게 슬쩍 “저 옆에 강릉 출신인 설기현만 있으면 딱이겠어요”라고 운을 떼자, “기현이 몸값이 워낙 세서요. 안 그래도 계속 관심의 끈은 놓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고향팀에서 제대로 일 한번 내겠다고 벼르며 베테랑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을용. 터프한 외모와는 달리 인간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와의 인터뷰는 항상 기자를 감동시킨다. ‘나중에 회나 먹으며 얘기하자’는 이을용의 제안이 반가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