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때리면 ‘안’이 어부지리…‘안’ 견제하려면 ‘반’ 띄워야
하지만 친노계는 ‘반기문 대망론’ 초반 강대강 구도라는 고전적 방법에 치중했다. 친노계 좌장격인 이해찬 무소속 의원은 6월 8일(현지시간) 반 총장과의 뉴욕 회동 하루 전 약속을 깼다. 반 총장이 회동 일정을 공개한 데 따른 항의 차원이다. 앞서 이 의원이 6월 5일 워싱턴DC에서 기자들과 만나 ‘반기문 필패론’을 제기한 지 이틀 만에 또다시 양측 신뢰에 금이 간 셈이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대망론을 바라보는 친노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친노계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친노계 고민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반기문 대망론’의 최대 피해자는 중도 무당층이 겹치는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다. ‘반기문 때리기’는 안철수 대세론을 강화하고 ‘반기문 띄우기’는 그 자체로 안 대표에겐 위협이다. 전자는 예선전(범야권 후보 단일화), 후자는 본선(여야 대선판)을 어렵게 한다. 친노계가 ‘반기문 대망론’을 놓고 진퇴양난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친노계와 반 총장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다. 참여정부 당시 외교부 장관을 맡았던 반 총장은 참여정부 외교라인의 핵심이었다. 반 총장이 2006년 2월 14일 유엔 사무총장직에 도전했을 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약 8개월간 15개국을 돌아다니면서 반 총장을 지원했다. 이 의원은 당시 참여정부 국무총리였다. 반 총장은 사석에서 이 의원을 ‘나의 보스’로 칭했다. 지난해 말 야권 발 정계개편 당시 DJ(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권노갑 전 상임고문이 ‘반기문 영입’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반 총장 행보는 여권에 방점을 찍었다. 지난 5월 25일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방한한 반 총장은 여권 실세인 친박(친박근혜)계와 공조행보를 펼쳤다. 일각에선 “‘치밀한 각본’에 의한 대권 행보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우지 않았다. 친노계 내부는 부글부글 끓었다. 친노계와 반 총장의 오랜 악연 때문이다. 반 총장은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 장례식에 불참했다. 추모 영상도 서면 메시지도 없었다.
2011년 8월 당시 민주당(현 더민주) 원내대표를 지냈던 김진표 의원은 당시 반 총장을 향해 “인간적으로 실망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반 총장은 그로부터 3개월 뒤인 2011년 12월 1일 봉하마을을 찾았지만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반 총장은 당시 비공개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친노계 인사들과의 연결고리도 없었다. 반 총장은 2007년 취임 이후 9년간 단 한 번도 친노계 핵심 인사를 만나지 않았다. ‘반기문·이해찬’ 회동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재 친노계는 낡은 프레임인 ‘호남 쟁탈전’에 갇힌 상태다. ‘김상곤 혁신안’의 핵심이었던 사무총장제 폐지 방침도 철회했다. 친노계 좌장 이 의원은 무소속 신분이며, 친문계를 이끄는 문 전 대표는 히말라야 트레킹 및 네팔 자원봉사를 위해 2주간의 일정으로 단기 해외체류를 택했다. 임시지도부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존재감은 한층 옅어졌다. 구심점 없이 이슈 따라가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친노계가 외연 확장은커녕 고립된 길에 내몰렸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여당 대권후보를 염두에 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전략적 선택의 스텝은 꼬였다. 급기야 진실공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이 의원 측은 반 총장으로부터 “차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고 주장한 반면, 엔 스테판 두자릭 유엔 사무총장 대변인은 “한국 측(이 의원)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개 여부도 논란거리였다. 이 의원 측에서는 애초 비공개로 약속했던 회동이 반 총장 측의 언론 플레이로 공개돼, 만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친노계 내부에서는 여권에 발을 걸친 반 총장이 이 의원과의 회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많았다. 이른바 ‘친노 연결고리’를 통해 외연 확장을 꾀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범주류 한 관계자는 “친박계 후보임을 스스로 증명한 반 총장을 만나는 건 의미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총장의 정치적 술수가 깔린 회동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의원도 반 총장의 말 바꾸기 등 일련의 행보에 대해 격노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이 의원이 6월 5일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에서 기자들에게 전한 “외교관은 정치에 탤런트가 맞지 않다”며 “그동안 외교관을 많이 봤지만, 정치적으로 대선 후보까지 간 사람은 없었다”고 비판한 연장선이다. 이로써 ‘반기문·이해찬’ 회동에 따른 대선 발 정계개편의 불씨는 일단 꺼졌다.
문제는 친노계가 입을 정치적 상처다. 당분간 양측은 살얼음판이 불가피하다. 이들은 지역(TK vs 호남)과 세력(친박 vs 친노), 이념(보수 vs 진보) 등에서 교집합이 거의 없다. 또한 ‘반기문 대망론’의 견고함과 양측의 갈등은 정비례 관계다. 반 총장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질수록 범야권의 ‘반기문 때리기’가 본격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친노계가 또다시 ‘반박’(반박근혜), ‘반반’(반반기문) 등 반대 프레임에 갇힐 개연성이 크다는 분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문 전 대표의 아킬레스건인 ‘외연 확장’에 빨간불이 켜지는 셈이다.
친노계가 갈등의 중심에 선다면, 문 전 대표의 부활 조건인 ▲호남 민심 복원 ▲2040세대 지지 ▲협치 리더십 등이 모두 무력화된다. 더구나 반 총장은 호남과 2040세대 등은 물론 전 지역·세대·계층을 가리지 않고 비교우위를 선점한 상황이다. 친노계가 ‘반기문 때리기’에 치중할 경우 역으로 비노계와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의 정치적 공간은 확대된다.
당장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4·13 총선 직후 반 총장을 향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반기문 때리기’에 가세했다. 야권의 한 전략통은 “김 대표는 지난 총선은 물론, 차기 대선에서도 ‘경제 이슈’가 승부를 가를 것으로 본다”며 “반 총장에 대한 발언은 ‘반기문은 경제는 아니다’라는 전략적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던 1997년 대선 당시 ‘경제에 약한 고리’를 안고 있던 ‘이회창의 데자뷔’를 반 총장에게 덧씌우려는 함의를 담고 있다는 의미다.
안 대표는 ‘반기문 대망론’에 대해 “서민들 보기엔 권력놀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안 대표는 6월 13~14일 전북 전주에서 탄소법 토론회를 비롯해 전주비전대학교 강연 등 호남 민심 탐방에 나선다. 1년 반가량 남은 대권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또한 20대 국회 원 구성 협상에서 ‘자율투표’를 골자로 한 국회의장직 선출 제안으로 꽉 막힌 여야 협상을 타개했다. 친노계만 정체다. 친노계가 이 딜레마를 타개하지 못한다면, ‘안철수 고사작전’도, ‘문재인 대세론’도 실패한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