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주도권 확보용 기획사정 의혹…야권에 불똥 튀면 더민주·국민의당 공조 차질
검찰이 롯데그룹 압수수색을 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검찰 발 사정 칼날에 걸려든 큰 먹잇감만 롯데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을 비롯해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혐의,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의 가습기 살균제 사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의 주식매매 혐의, 농협회장 선거 부정, 폭스바겐 연비 조작 사건, 김수민 국민의당 의원의 리베이트 의혹 등 크게 6가지다.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 수사가 진행 중인 셈이다. 야권에는 호재 이슈다.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야권 특정 인사가 검찰의 사정 칼날에 걸려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 정권과는 다른 패턴의 박근혜 정부 4년차 검찰 수사, 이 수수께끼에 답이 있다.
검찰 발 사정 카드는 역대 정권의 집권 4년차 단골메뉴였다. 임기 말 레임덕(권력누수)에 빠진 정권은 검찰 수사를 십분 활용, 국면전환을 꾀했다. 여기에는 집안 단속을 통한 국정 장악력 확보 및 여야 정치권의 도전 봉쇄 등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다. 또한 복지부동한 공무원 조직을 다스리는 한편, 대기업 등 재계 길들이기 전략도 깔렸다. 한마디로 검찰 발 사정정국 조성은 정권의 말기적 현상을 최대한 유예하는 최적의 카드라는 얘기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박근혜 정부 4년차 ‘사정정국 방향성’이 이전 정권과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역대 정권의 사정정국 카드를 보면 4가지의 큰 흐름이 나타난다. 먼저 대통령 집권 1∼2년차 때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단행, 전 정권 흔적 지우기에 나선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이 대표적이다. 3년차에 접어들면 야당 정치인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여당 의원을 끼워 넣는다. 4년차 때는 대통령 측근의 권력형 비리, 5년차 때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 등으로 자의 반 타의 반 검찰 발 사정 카드를 꺼낸다.
특히 역대 정권들은 임기 말 측근과 친인척들 권력형 비리로 수면 아래 있던 ‘대형 게이트’가 급부상, 검찰 카드를 쓸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노태우 정권에선 집권 4년차(1991년) 때 수서비리 사건이 터졌다. 김영삼(YS) 정부는 1996년 장학로 당시 청와대 제1 부속실장의 뇌물 수수와 이양호 국방부 장관과 이성호 보건복지부 장관 부인의 금품수수 의혹 등으로 휘청거렸다. 김대중(DJ) 정부는 2006년 ‘이용호 게이트’, 노무현 정부는 ‘바다이야기 파문’, 이명박(MB) 정부는 ‘저축은행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검찰 수사는 롯데그룹 등 대기업 비리 수사에 방점이 찍혀 있다.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의 권력형 게이트로 시작된 검찰 발 사정정국이 아니다. 역대 정부의 사정 시나리오와는 다른 부분이다. 역대 정부보다 박근혜 정부의 의중이 크게 실린 게 아니냐는 분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대구·경북(TK) 출신인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중심으로 한 사정에 박 대통령의 ‘적극적 의지’가 담겼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른바 ‘고강도 기획 사정’이다. 더민주 한 관계자는 “성역 없는 수사가 원칙이지만 왜 이 시기에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거냐. 정국 주도권 확보를 위한 국면전환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야권이 검찰 발 사정정국에 웃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다.
다음 수수께끼는 ‘동기 찾기’다. 통상적인 사정정국 조성에는 대통령의 충성파 골라내기 및 야권 갈라치기 등이 내재돼 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4·13 총선에서 참패했다. 박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30% 초반까지 떨어졌다. 이번 검찰 사정 핵심 타깃은 대표적인 ‘친 MB기업’ 롯데그룹이다. 박 대통령이 친이(친이명박)계 인사들을 정조준, 전 정권과의 차별화로 위기 정국을 정면 돌파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사정정국을 통해 친이계 실세들을 옥죄려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반대 의견도 나왔다. 친이계를 제물로 삼을 실익이 있느냐는 논리다. 익명을 요구한 야권 전략통은 “검찰이 제도권에서 멀어진 친이계를 친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친이계 핵심인 이재오 전 의원은 낙선했다. 이상득 전 의원 영향력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친이계 비주류로 통하는 정두언 전 의원은 MB와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현재 새누리당 내에는 비박계만 있을 뿐 정치적 세력으로서의 친이계는 해체됐다.
지난해 정국을 강타한 방위사업 비리는 MB 정부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에만 칼날을 들이댔을 뿐, 친이계 실세들에게는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MB 정부와의 유착기업이란 오명을 떠안은 포스코 수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력투입의 ‘저인망식’ 수사에도 롯데그룹 비자금 수사가 MB 정부 실세를 겨냥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경우에 따라 여권 실세는커녕 일부 야권 인사들에게 불똥이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은 국민의당 진상조사단의 부인에도 김수민 리베이트 의혹을 정조준하며 연일 수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국민의당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내분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총선 후 제3당으로 자리매김한 국민의당이 최대 위기에 몰린 것이다. 국민의당과의 공조로 국회를 장악하려던 더민주 전략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야권이 웃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다.
사실 박근혜 정부의 롯데그룹 수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세청은 2013년 ‘재계의 저승사자’인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등을 투입, 롯데그룹 핵심 계열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했다. 검찰은 그해 2월 호텔롯데 세무조사, 7월 롯데쇼핑 조사를 진두지휘했다. 역외탈세 조사 담당 인원까지 투입하고도 롯데쇼핑에 630억 원의 추징금을 부과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4년차 검찰 발 사정정국이 청와대와 검찰, 국세청 등 삼각편대가 짜고 치는 고도의 ‘기획 수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정정국 이슈가 블랙홀로 작용, 여권의 ‘이슈 갈라치기’에 야권이 무방비로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정치권 주요 이슈는 롯데그룹 수사 등에 묻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야권이 웃지 못하는 세 번째 이유다.
윤지상 언론인
측근비리→선거참패→레임덕 ‘도돌이표’ 역대 정권 4년차 잔혹사 살펴보니 역대 정권들이 집권 4년차 때 검찰 발 사정 드라이브를 건 것은 ‘레임덕(집권 말기 권력누수 현상) 현상’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87년 체제’ 이후 출범한 정권들은 하나같이 임기 말 레임덕에 빠졌다. 이는 5년 단임제의 대표적 폐단으로 꼽힌다. 오랜 독재정권의 철권통치를 경험했던 국민들은 특정 정파의 장기 집권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5년 단임제를 택했지만, 어느 누구도 4년차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종의 ‘단임제 징크스’로 작용한 것이다. 실제 민주화 이후 출범한 김영삼(YS)·김대중(DJ)·노무현·이명박(MB) 정부 등 역대 정권들은 ‘임기 말 측근 비리→선거 패배→레임덕 가속화’ 등의 도돌이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 발 사정정국 조성은 국면전환을 위한 단골메뉴였다. YS 정부는 집권 초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 등 문민개혁을 단행하면서 8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3년차 후반 땐 제네바 합의 등으로 북핵 위기의 파고를 넘으면서 임기 말 징크스를 피하는 듯했다. 하지만 4년차에 접어들자 장학로 당시 청와대 제1 부속실장의 뇌물 수수 의혹이 일면서 타격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외환위기의 첫 발화점인 ‘한보 게이트’가 정권을 덮쳤다. ‘한보 게이트’에는 YS 정부의 소통령 차남 현철 씨가 연루, 정권 위기를 부채질했다. YS 정부의 위기 징후는 4년차 초반 한층 심화됐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은 1996년 4·11(제15대) 총선에서 전체 299석 가운데 139석만 차지,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던 DJ도 4년차 징크스를 피하지는 못했다. 2년차에서 옷 로비 사건으로 위기를 겪었던 DJ 정부는 3년차 때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하면서 과반의 지지율을 확보했다. 그러나 4년차 접어들자 ‘이용호·정현준·진성호’ 게이트가 일제히 터졌다. 4년차 때 치러진 10·24 재보선에서 집권 여당은 서울 동대문을과 구로을, 강원 강릉에서 모두 패했다. 앞서 같은 해 4월 은평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자리를 뺏겼다. 특히 정권 말 DJ 세 아들 ‘홍일·홍업·홍걸’ 씨가 나란히 비리에 연루됐다. 이른바 ‘홍삼 트리오’에 직격탄을 맞은 DJ 정부는 사실상 내리막길을 걸었다.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집권 초반 나라종금 로비 의혹 사건 등 측근 비리와 대북송금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던 노무현 정부는 2년차인 탄핵 역풍으로 지지율 반등에 성공했다. 하지만 3년차 때인 2005년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 지지층 민심이반을 촉발했다. 이어 4년차 중반 치러진 5·31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하면서 레임덕이 본격화됐다.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전국 기초단체장 230곳 중 차지한 의석수는 불과 19곳. 반면, 한나라당은 155곳을 비롯해 민주당 20곳, 국민중심당 7곳, 무소속 29곳 등을 기록했다. 같은 해 10월 재보선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서울 송파갑·성북을, 부천 소사, 경남 마산갑 등 4곳에서 완패했다. 권력형 비리인 ‘윤상림 게이트’와 법조비리인 ‘김홍수 게이트’ 등과 더불어 부동산 폭등에 따른 지지층 분열로 정권이 휘청거렸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4년차 때 은진수 감사원 감사위원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 이상득 새누리당 의원(이상 모두 당시 직책) 등 여권 실세들이 저축은행 사태에 연루,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11년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김해을 한 곳에서만 이기고 경기 성남 분당을, 전남 순천, 경남 김해을 등 3곳을 내줬다. 같은 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지지율 고공행진을 벌이던 박근혜 정부도 임기 4년차 2016년 4·11 총선에서 과반에 실패했다. 그러자 집권 4년차 중반 검찰 발 사정 칼을 꺼내 들었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