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원장 상근화와 감사·감시 체계 강화 등 나와…장동혁 ‘재선거·사전투표 폐지’ 제안 현실성 낮아

6월 3일 서울 송파구 일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오후 6시 방송사들이 일제히 출구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상황에서 투표가 진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6월 5일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선관위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차단하기 위해 투표지 인쇄 물량을 최소화하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한국행정연구원이 선관위 용역으로 발간한 ‘선거 절차사무 개선방안’에는 잔여 물품이 많을 경우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잔여 투표용지를 부정선거에 이용한다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의식한 대목으로 풀이된다. 음모론 차단을 위한 조치가 도리어 음모론 확산에 불을 지핀 꼴이 된 셈이다.
선관위 관계자 사전투표율 증가에 따른 본투표 투표용지 폐기 문제, 부정선거 음모론 대응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2020년 ‘민경욱 투표용지 탈취사건’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당시 미래통합당 민경욱 의원은 자신이 확보한 본투표용 용지를 공개하며 부정선거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투표용지를 넘긴 제보자는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공익 신고자’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관위 대응은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6월 3일 선관위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투표소를 총 14곳이라고 발표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도 이날 4시 25분 서울 송파구 가락2동 제3투표소 민원인 전화를 받은 후에야 인지한 것으로 파악됐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곳은 계속 늘어났다. 선관위는 6월 5일에는 50곳으로, 8일에는 91곳으로 정정했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 수는 파악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인쇄 매수 하한선 ‘60→50%’ 지침 변경 관련 회의록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침 변경에 대한 공식 회의조차 없었던 것이다. 중앙선관위는 ‘인쇄 매수 결정은 각 지역 선관위 권한’이라는 입장이고, 송파구 선관위는 ‘중앙선관위 지침과 과거 투표율을 고려’했다며 책임 공방을 벌이는 모습이다.
선관위는 전원 외부 인사로 꾸려진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투표지 부족사태 원인 및 책임 소재 규명 작업에 나섰다. 위원회는 6월 10일부터 19일까지 운영된다. 한국여성변호사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등을 지낸 조현욱 변호사가 진상규명위원장을 맡았다.
정치권은 사태 수습을 선관위에만 맡길 수 없다며 직접 나섰다. 선관위의 ‘셀프 개혁’이 매번 공염불에 그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2022년 코로나 확진자 ‘소쿠리 투표’ 논란 △선거 기간 휴직자 증가 문제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 관행 등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선거관리혁신위원회(소쿠리투표)’ ‘독립적 감사위원회(자녀 특혜)’ 등의 대책을 내놨지만 매번 새로운 논란에 휩싸이며 자정 의지가 없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선관위 개혁 방안으로는 가장 먼저 선관위원장 상임직 전환이 거론된다. 이재명 대통령과 4부 요인(조정식 국회의장, 조희대 대법원장, 김상환 헌재 소장, 김민석 국무총리) 회동에서는 중앙·지방 선관위원장을 법관이 비상근 겸직하는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왔다. 무소속 한동훈 의원은 6월 8일 소셜미디어(SNS)에 상임직 전환 법안 발의를 예고했다.
중앙선관위는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각 3명씩 임명·선출·지명한 위원으로 구성된다. 관례적으로 대법관인 선관위원이 비상근 위원장을 맡아왔다. 그동안 헌법상 책임은 위원장에게 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사무총장이 도맡는 상황이 계속됐다. 지역 선관위원장도 지방법원장 또는 지원장·부장판사가 비상근 겸임하고 있다. 위원장의 조직 장악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는 방만 운영과 기강해이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법원과 선관위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방안도 제기된다. 비상근 선관위원장직을 법관이 겸임하면서 같은 헌법기관인 선관위가 사법부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는 형국이 됐다. 중앙 및 각 지역 선관위원장이 선거관리 책임자인 동시에 선거법 관련 소송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다. 한동훈 의원은 “(두 기관이) 한 몸처럼 밀착되면 공정한 재판에 대한 합리적인 우려가 생기고, (법원과 밀착한) 선관위는 더욱더 막강해진다”고 꼬집었다.

선관위 감시 체계 확립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한동훈 의원은 선관위에 대한 감사원 직무감찰 허용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고, 강명구 국민의힘 의원은 행안위 국정감사 대상을 중앙선관위에서 각 시도 선관위까지 확대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는 선관위 독립성 침해 여부다. 헌재는 2025년 2월 채용 비리 등에 대한 감사원 직무감찰이 선관위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대통령이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을 임명하는 만큼 선관위 직무감찰을 허용하면 선관위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국회 국정감사 및 국정조사 등 외부적인 통제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감사원 직무감찰 허용 건은 헌법 개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선관위 독립성 문제는 국회의 선관위 개혁법안 논의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법안으로는 외부 위원이 참가하는 선관위 감사위원회 설치 법안(윤준병 의원)과 선관위원장 상근직 전환 법안(위성곤 제주지사 당선인),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국회 인사청문 의무화 법안(조은희 의원)이 발의된 상태다. 이 법안들은 별다른 논의 없이 계류되고 있다. 국회가 선관위 개혁에 뒷짐을 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 민주당 재선 의원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독립성과 자율성이 있어 관련 내용을 손대기가 어렵다고 하는 인식이 의원들 사이에도 있다. (선관위가) 자체적으로 개혁을 한다고 그러니 기대하고 놔뒀는데, 이번에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것처럼 드러났다”며 “(이번에는 개혁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 가로막는 부정선거 공방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번 사태 수습책으로 ‘재선거·재투표’와 사전투표 폐지를 제시했다. 장 대표는 6월 9일 SNS에 전국에서 발생한 투표지 부족 사태가 재선거를 실시할 근거라고 했다. 공직선거법 제198조는 천재지변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관련 투표구 재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다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다고 인정되는 경우 재투표는 실시되지 않는다. 장 대표의 제안이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사전투표 폐지 근거로는 국민들이 사전투표에 의구심을 품고 있고, 인천광역시와 광주전남 통합특별시의 사전투표 결과 일부 투표소에서 후보자 득표수가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는 점을 들었다. 인천선관위는 박찬대·유정복 후보 득표수가 송도1·2동 지역이 있었지만, 전체 선거인 수·다른 후보 득표수·무효표 수가 모두 달랐다고 했다. 전남선관위도 송정1동과 금산면에서 민형배·이정현 후보의 득표수는 같지만, 선거인 수·다른 후보 득표수 모두 달랐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는 장 대표가 지방선거 이후 약화된 당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이른바 ‘윤 어게인’ 지지층 결집을 위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윤 어게인’ 지지층은 사전투표 조작설 등 ‘부정선거 음모론’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김민하 시사평론가는 “투표용지가 남아서 문제라고 이야기하니 이를 줄여보자고 해서 이 사달이 난 거 아닌가”라며 “(위원장 상근화 등) 선관위가 유능하고 책임성 있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만, 부정선거론에 대해 선관위가 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배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 평론가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국민의힘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근거로 (장동혁 등이) 생명 연장을 기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