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궁동 부녀자 강간 살인사건 미스터리
엄궁동 2인조 현장검증 사진
# 강변도로
1990년 1월 4일 새벽 1시 30분께, 부산 사하구 신평동 인근 강변도로 앞. 오가는 차량도 없고 지나는 사람도 없다. 새로 설치된 가로등은 불빛을 내지 않고 달빛도 비추지 않는다. 멀리서 두 남녀를 태운 차가 달려와 멈추더니, 전조등을 끈다. 둘은 그 자리에서 사랑을 나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여자가 차에서 내린다. 강변 도로 인근에 위치한 신흥 주택가로 뛰어간다. 남자는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눕는다. 얼마 뒤, 남자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괴한이다. 남자가 누워있는 차 문을 열자마자 들고 있던 돌로 그의 얼굴을 때린다. 아무런 말도 없다. 무차별 폭행은 계속 된다. 동시에 운전석 문이 열린다. 괴한은 한 명 더 있다.
주택가로 뛰어갔던 여자가 돌아온다. 차 문을 열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본다. 깜짝 놀라 소리도 내지 못한다. 괴한은 남자를 살리려면 차에 타라고 말한다. 여자가 머뭇거리자 강제로 팔을 끌어 뒷좌석에 태운다. 자동차의 전조등이 켜지고, 엄궁동으로 향한다.
같은 날 오전 06시 40분께, 부산 북부 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된다. 범죄 피해자로 보이는 환자가 내원했다는 의사의 신고다. 병원으로 출동한 경찰은 앞서의 남성을 만난다. 남성은 괴한이 덮쳤다고 말한다. 그들을 피해 도주했고, 이후 격통이 느껴져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형사들은 남성이 알려준 장소로 발길을 옮긴다. 남성의 차량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 갈대숲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된다.
#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
앞서의 내용은 1990년 1월 4일 오후, 남자 A 씨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A 씨는 경찰에 “함께 있던 여자가 자신의 집에 물을 뜨러 간 사이, 괴한들이 나타나 자신이 탄 자동차를 덮쳤다”고 진술했다. 폭행에 이유는 없었다. “돈이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대답 대신 주먹이 돌아왔다. 잠시 뒤 물을 가져온 여자 B 씨가 돌아오자, 괴한들은 그를 강제로 차에 태워 엄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괴한들은 엄궁동 인근 강변도로에 자동차를 세웠다. 이곳에서도 오가는 차와 사람, 가로등은 없었다. 괴한들은 차에 있던 접착테이프로 A 씨의 손을 뒤로 묶고 입을 막았다. 이후 A 씨를 두고 “죽어야 한다”며 갈대숲을 지나 낙동강에 밀어 넣었다. A 씨는 물속에서 테이프를 풀고 나왔고, 괴한 중 한 명과 격투를 벌였다. 잠시 괴한이 멈칫한 틈을 타 B 씨에게 도망치라고 소리를 치며 달렸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근처 공장에 한동안 몸을 숨겼고, 직원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북부 경찰서 수사 기록을 보면, 싸늘하게 식은 채 경찰에 발견된 여자 B 씨는 오른쪽 두개골이 함몰된 채 발견됐다. 상의와 속옷은 목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으며, 하의는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사라진 금품은 없었다. A 씨의 지갑과 B 씨의 금반지 등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증거도 없었다. 지문이나 범행 도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장에선 피 묻은 돌멩이, 머리카락 등이 나왔지만, 국과수 감식 결과 모두 A 씨, 또는 B 씨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정액이 묻은 것으로 보이는’ 손수건에서 AB형의 혈액형이 검출됐다. 다만 여기서 국과수는 “정액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혈액형을 판정했다. 이 경우 A형과 B형, A형과 AB형, B형과 AB형이 혼합된 경우도 AB형으로 반응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A 씨의 자동차 안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은 A형과 B형이었다. 남성 A 씨의 혈액형은 A 형, 여성 B 씨의 혈액형은 B형이다.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는다. 경찰은 당시 성행하던 ‘카 데이트족’을 상대로 한 우발적 범행으로 추정하는 한편, 동일 수법 전과자 27명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였지만 용의자 특정에 실패했다. 반면 경찰은 A 씨와 B 씨 각각 배우자와 자녀가 있었으며, B 씨 남편의 경우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직장까지 그만둔 사정을 확인했으면서도 추가 조사는 하지 않았다. 또한 A 씨가 사건 발생 이후 도주한 뒤 의사가 경찰에 알릴 때까지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확인 절차는 없었다.
A 씨는 1992년 두 남자의 2심 재판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한다. 결국 이 사건에선 A 씨가 경찰 수사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범인들의 인상착의만 남았다. A 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피의자 2명, 한 명은 체격 좋고 얼굴 동글 넓적. 보통머리, 잠바착용, 흰장갑, 부산말씨. 또 다른 한 명은 체격 적고 호리호리, 얼굴 홀쭉, 잠바착용, 부산 말씨.”
# 바뀌는 진술, 또렷해지는 기억
앞서의 범인 인상착의는 1989년 12월 최현철 씨(가명)과 장성익 씨(가명)에게 강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한 순경의 진술(기사 링크)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순경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범인의 인상착의와 범죄 수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한 명은 체격이 크고 험상 굳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체격이 작고 야윈 얼굴입니다. 둘 다 경상도 말씨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시정되지 않은 차 문을 열려고 식칼 뒤로 유리를 파손한 뒤 침입했습니다. 이후 7만 원을 갈취했고 옷 벗으라고 한 뒤 저를 트렁크에 밀어 넣고 운전한 뒤 도주 했습니다.”
수사 기록을 보면, 부산 사하경찰서는 최 씨와 장 씨에 대해 살인 혐의를 먼저 적용하고, 경찰관을 상대로 한 강도 혐의를 적용했다. 경찰은 “엄궁동 살인사건과 경찰관 강도사건의 범인 인상착의와 범죄 수법이 같다. 특히 최현철의 혈액형이 AB형이다”라며 두 남자를 집중 추궁한다. 이후 “최 씨는 피해 여성인 B 씨를 강간했고, 달아나는 B 씨를 각목으로 내리쳤다. 장 씨는 쓰러진 B 씨의 머리를 돌로 내리쳐 살해했다”는 구체적인 살해 정황도 추가 한다. 이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북부 경찰서 수사 기록에는 성폭행 관련 내용이 없었다.
최 씨와 장 씨는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자백한다. 하지만 진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진다. 검거 직후인 1991년 11월 11일 진술과 11월 14일 2차 진술은 “차의 유리를 깨고 피해자의 돈을 빼앗았으며, 트렁크에 감금했다”는 골격 사실은 일치하지만,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앞서의 A 씨 진술과 크게 다르다. 예를 들면, 시력이 좋지 않아 운전면허를 딸 수 없는 장 씨가 엄궁동까지 운전을 했다거나, A 씨의 지갑을 훔쳤다고 했다가 다시 돌려줬다고 번복하는 식이다.
허점이 발견되는 진술도 있다. 피해 여성인 B 씨 살해 방법이다. B 씨는 오른쪽 두개골이 함몰된 채 발견됐다. 최 씨와 장 씨는 최초 진술에서 “각목으로 내리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주본 상태에서 오른쪽 머리를 강하고 정확하고 내리쳤다면 왼손잡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최 씨와 장 씨에게 “왼손잡이냐”고 물었지만 둘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피해자 B 씨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로 강하게 돌에 맞은 것으로 ‘정리’된다. 하지만 B 씨의 머리 뒤 쪽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이러한 두 남자의 오락가락 진술은 검찰 조사에서까지 계속된다.
반면 피해자들의 ‘기억’은 점차 뚜렷해진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순경과 “둥글 넓적, 얼굴 홀쭉”이라고 진술한 A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최 씨와 장 씨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범인이 맞다”고 확신한다.
살인사건은 최 씨와 장 씨 검거 1년 전, 순경 강도 사건은 2년 전 발생했다. A 씨는 사건 발생 직후에도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며 몽타주도 그리지 못했다. 강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한 순경은 신고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앞서 북부 경찰서에서 사건 발생 직후 작성된 ‘엄궁동 살인사건 기록’에 두 남자의 진술을 끼워 맞췄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대목이다.
# “진범이 틀림없다”
검찰은 경찰 조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최 씨와 장 씨는 검찰 조사에서야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당시 담당 형사 1계 주임(팀장)을 불러 고문과 허위자백에 대해 물었다. 두 남자를 검거한 이후 특진을 한 해당 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 씨가 너무 자연스럽게 자백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부인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엄궁동 살인사건 증거는 정액을 닦고 버린 손수건에서 검출된 AB형 혈액형입니다. 혹시나 하여 최 씨에게 혈액형을 물었더니 AB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최 씨가 범인이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고 수사에 임하게 됐습니다. 또한 이 사건 범인이 검거된 것은 수법 상 공통점이 있어 꼬리가 잡힌 것입니다. 범인들은 자가용을 탄 남자와 여자를 대상으로 경찰관을 사칭해 금품을 빼앗았는데, 엄궁동 살인사건 때도 자가용을 탔고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비슷해 수사를 했고 진범이 틀림없었습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