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증거 ‘올킬’ 시킨 두 남자의 ‘자백’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당시 엄궁동 2인조 사건은 언론에도 연일 보도됐다. 경찰 조사대로라면 가정주부를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론은 들끓었고, 이들의 재판에 관심이 모아졌다.
1심과 항소심에서 검찰 측은 △두 남자가 경찰과 검찰에서 범행을 자백한 점, △사건 피해자 남성인 A 씨가 이들을 범인으로 지목한 점, △ 최현철 씨(가명)의 혈액형이 현장에서 수거된 피해 여성 B 씨의 손수건에서 나온 정액 혈액형과 일치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이들의 무죄주장을 일축했다.
그러나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은 △이들이 범인이라는 직접증거가 전혀 없으며, △경찰에서의 자백은 물고문 등 가혹행위에 견디다 못해 한 허위이고, △최 씨의 1차 검찰자백도 고문경찰이 검찰청까지 동행하면서 계속 협박하는 등, 고문의 연속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최 씨의 가족들이 위증 혐의로 처벌을 받기도 했다. 최 씨는 엄궁동 살인사건 발생당일인 1990년 1월 4일 “신정을 맞아 부인과 자녀들을 데리고 대구에 있는 처가에 갔다가 5일 돌아왔다”며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당시 검찰 측은 최 씨의 처남과 처숙모를 증인으로 채택한 뒤, 이들이 법정에서 “최 씨 가족이 신정 때 처가에 왔다가 큰집인 남씨 집에까지 와서 놀다 갔다”고 최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하자, 영장 없이 연행했다. 처숙모는 위증 혐의로 구속 됐고, 처남은 같은 혐의로 약식기소, 최 씨의 부인은 위증 교사 혐의로 구속 됐다.
변호인 측은 검찰이 최 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한 증인들을 불법연행, 폭행과 협박, 회유로 진술을 번복시킨 뒤 위증으로 몰았다고 주장했지만, 부산지법은 부인과 처남에게 각각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 ‘증거의 왕’ 자백
문 전 대표(당시 변호인)가 항소심서 두 남자의 변론을 위해 작성한 기록을 보면, 크게 고문과 허위자백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무죄 주장을 위한 정황상 증거로 나뉜다. 고문의 경우 두 남자와 함께 부산 사하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던 수감자 3명이 법정에 서서 증언했다. 또한 최 씨의 경우 “당시 고문으로 입은 팔과 이빨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며 사진을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장 씨의 경우엔 직장 출근 기록과 시력 소견서를 제출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경찰 수사 기록엔 최 씨와 장 씨가 엄궁동 살인사건 발생 당일인 1990년 1월 4일 오후 5시에 만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장 씨의 직장 출퇴근 내역서를 보면 오후 9시 30분까지 야근을 했다. 다음날인 1월 5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시력의 경우 “시신경 위축, 시력 측정 불가”라는 소견서를 제출하며 “달빛도, 가로등 불빛도 없는 심야 시간에 피해자와 격투를 벌이고 추격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변호인은 A 씨에 대해 “피해자 등의 범인 지목 진술이 논리와 경험에 맞지 않고 일관성이 없다. 장 씨의 경우 피해자가 정확히 지목하지 않고 있는 등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담당 수사 경찰에 대해서는 “경찰이 공무원 자격사칭 혐의로 구속한 뒤, 고문을 통해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두 남자에게 유죄를 인정하고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범행을 부인하고 있지만, 수사 과정에서 모두 자백했고,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공소사실이 인정돼 극형을 면키 어렵다”며 “그러나 피고인들이 다른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참작해 이같이 선고한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들이 강도살인죄 등에 대해 경찰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경찰이 자백한 범인에 대해 고문을 할리 없고, 상처부위와 고문의 개연성이 낮다”고 판시했다. 이어 “최 씨의 알리바이 주장도 이를 입증하는 증언을 했던 친척들이 위증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되는 등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자백은 변함없이 ‘증거의 왕’으로 군림했다. 법원에 제출된 증거 기록에도 두 남자의 자백과 피해자와 경찰관의 진술만 명시돼 있다. 판결은 증언과 진술만을 가지고 이뤄졌다. 숨진 여성을 내리친 각목, 돌멩이 등 범행 도구도 없었다. 두 남자의 자백 하나가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다른 증거를 모두 지워버렸다.
두 남자에 대한 재심 청구 여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세상에서 고립된 시간 21년, 다시 재판받기를 소망한 시간 3년. 24년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