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 호수와 동굴 안의 강 ‘시간이 만든 비경’
타랑마을의 남뚜언 호수가 먹빛으로 잠들고 있다. 멀리 고사목 숲이 보인다. 사진제공=다큐멘터리 사진가 류기남
팍카딩에서 8번 도로로 들어와 산길을 오르면 오른쪽에 전망대(View Point)가 있습니다. 타캑 루프를 도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 고원으로 올라갑니다. 타랑마을과 저멀리 남뚜언 호수가 보입니다. 고원지대의 맑디맑은 호수. 드넓은 호수 위의 고사목 숲. 고사목들은 황량하면서도 다정하기까지 합니다. 호숫가에 서너 개의 게스트하우스와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마을을 한바퀴 돌다 사바이디 게스트하우스에 차를 세웁니다. 목조 방갈로풍 숙소는 아담합니다. 한국 관광객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여행 마니아들만 오는 지역입니다. 지명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게다가 오는 길도 험난한 곳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호숫가를 걷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호수로만 보였는데 가까이 보니 수십 킬로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배를 타고 구경해도 하루가 걸린다고 합니다. 호수 안에 작은 섬들이 수십 개가 떠 있습니다. 이곳이 아름다운 까닭은 고사목이 만들어낸 풍경 때문입니다. 물길을 막아서 서서히 고인 호수인지라 숲의 나무들이 모두 고사목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면 모두 호수로 잠길 나무들의 마지막 자태. 헐벗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모습이 장관입니다.
남뚜언 호숫가에 어둠이 내립니다. 한적한 시골은 짙은 먹빛으로 캄캄해집니다. 호수도 물결소리 외에는 어디도 보이질 않습니다. 문득 호수 안에 있는 섬을 노래한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Yeats)의 시가 생각납니다. 이니스프리 섬(The Lake lsle of Innisfree)입니다. 이니스프리는 시인 예이츠가 살던 고향의 호수 안에 있는 작디작은 섬입니다. 보랏빛 히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호숫가를 비추는 섬. 예이츠는 이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이곳 타랑마을의 남뚜언 호수에도 작은 섬들이 많습니다. 히스꽃 대신 고사목들이 맑은 호수에 비추어 그윽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꽁로마을 풍경. 구름 걸린 석회암 산들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다. 사진제공=다큐멘터리 사진가 류기남
다음 행선지는 꽁로마을입니다. 꽁로에는 아름다운 비경이 있습니다. 마을 깊숙이 자리잡은 꽁로동굴입니다. 그리고 산과 길입니다. 방비엥의 산들처럼 석회암 산들이 마을 양편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집니다. 구름과 안개가 산중턱에 걸려 하루종일 떠있습니다. 마을로 깊이 들어가는 길들은 중앙으로 곧게 뻗어 있습니다. 양편에 있는 경작지는 대개 쌀과 담배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꽁로동굴은 한마디로 ‘동굴 안의 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베트남 하롱베이 바다동굴, 미얀마의 몰레마인 불교유적 동굴 등 인도차이나 동굴을 많이 보았지만 이런 동굴은 처음 보았습니다. 우선 높이와 폭이 10여 미터에서 60여 미터까지 다양합니다. 이 동굴 터널의 길이도 빠져나가는 데 만도 7km가 넘는다고 합니다. 모터 달린 날씬한 보트로도 한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동굴 안으로 강이 흐릅니다. 군데군데 넓고 고요한 호수도 있습니다. 입구에서 출구까지 캄캄하고 긴 터널을 보트로 관통합니다. 뱃사공이 구명조끼와 헤드랜턴을 나눠줍니다. 처음에는 로마의 크나큰 성당 안 그림처럼 수많은 종유석이 늘어져 있고 석주가 나무들처럼 서있습니다. 손때 묻지 않은 태고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가까이 가보니 라오스 비엔티안에 있는 개선문 모습도 있습니다. 여인의 치마폭, 양떼구름, 꽃이 핀 정원 등 그림 같은 모습들이 동굴 안 작은 언덕에 조각되어 있습니다. 모두 자연과 시간이 만든 무늬입니다.
꽁로동굴의 비경. 동굴 안으로 강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넓고 고요한 호수도 있다. 사진제공=다큐멘터리 사진가 류기남
이렇게 얘기를 나누다보니 제가 직장 다니던 시절 읽은 신문기사가 생각납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교포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여행을 떠난 한 할아버지가 여행지에서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지만 서로에게 이끌리어 얘기를 하다보니 서로 첫사랑 얘기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던 그 청년은 자기 할머니의 첫사랑 스토리와 너무 똑같아서 놀랐습니다. 연락처를 갖고 돌아온 청년은 할머니가 바로 그 첫사랑의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기사입니다. 두 분은 모두 아내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았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제 동굴 입구로 되돌아갈 시간입니다. 모터보트를 타고 다시 돌아갑니다. 꽁로동굴은 석회암 산 절벽에서 시작되어 반대편 절벽으로 빠져나가는 코스입니다. 그 동굴 안에는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넓은 호수, 높은 천장의 종유석 그림들, 물결 무늬로 굳어버린 모래사장, 물방울이 떨어지며 만들어 낸 돌의 무늬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무게로 만들어진 놀라운 자연의 무늬를 보며 제가 만들어 온 ‘인생의 무늬’는 어떤 색깔일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