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한 번 혈액투석하면서도 서울구치소 찾아…억울한 재소자 위한 구명활동도 펼쳐
삼중 스님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스님이 합장으로 맞이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며 보청기를 꺼내 귀에 걸면서도, 손을 잡아 자리로 이끄는 일은 잊지 않았다. 힘겹게 자리에 앉은 스님이 다시 웃었다. “이렇게 몸이 불편합니다. 언제까지 귀를 기울일 수 있을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였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부처님 말씀을 전한 스님에게 기자가 던진 말은 거칠고 무례했다. 설법보다는 스님의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이 궁금하다고 했다. 자칫 그의 말이 종교적 관념으로만 전달돼,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기우였다. 스님이 담담히 꺼내 놓은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무지한 부탁을 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준비했던 질문을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잦아졌고, 수첩과 펜에서 손이 떨어지는 시간이 늘어났다.
# 서대문구치소
삼중 스님은 1967년부터 대구교도소를 시작으로 재소자 교화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이 활동이 자신의 ‘꿈’이자 ‘운명’이라고 했다. 탄생부터 교정시설과 인연이 있었던 것.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 서대문구치소 담 뒤였다. 늘 오가던 담장 너머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총을 든 사람들과 그들에게 끌려 나와 근처 논밭에서 일을 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똑같이 머리를 하얗게 깎고, 푸른 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궁금했다.
“죄를 져서 그렇다. 저들은 죄수다.” 스님이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힘들게 일하다 붉은 담(구치소)으로 끌려가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님은 그저 저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단순했고, 동정에 가까웠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담장 너머의 사람들을 위한 인권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고등고시라고 불리던 사법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 출가
그러던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다. 언급하기 어려운 일로 집안이 어려워지고, 동시에 세 번의 자살 기도까지 이어지던 때였다. 스님은 당시 겪은 일의 원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꼭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출가 결심은 분노와 복수심에서 시작됐다.
스님은 “문득 ‘타락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를 하겠다는 망상에 따라 정말 그렇게 됐다고 해도, 그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내가 쏜 화살은 또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게 뻔했다”고 당시의 고뇌를 회상했다. 그는 “그러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는 것. 한 평생을 선하게 사는 게 진정한 복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그 날로 대구에서 경남 합천 해인사까지 걸었다.
스님이 된 그는 ‘부처님이 원하는 삶’이 궁금해졌다. 스님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밤낮 없이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가난하고 아픈 삶을 사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걸 깨달았다.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꿈이 떠오른 건 그때부터다. 스님은 ‘재소자들은 몸과 마음이 지옥의 삶을 사니, 그들을 구제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부터 재소자 교화는 스님이 살아가는 이유고, 꿈을 실현하는 길이며, 부처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구교도소를 시작으로, 스님의 설법을 들은 각 교정시설의 재소자들이 점차 마음을 열었고, 스님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스님이 모은 그들의 편지는 절간 한편을 가득 채울 정도다. 일부는 책으로도 발간됐다.
삼중 스님이 ‘억울한 재소자’를 위해 펼친 구명 활동도 앞서의 깨달음에서 시작됐다. 스님이 직접 구명에 나서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일부 재소자는 감형이 되기도 했다. 각각의 사례는 본인 또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더 이상 공개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일부 관계자들은 아직도 스님을 찾아온다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 사형수의 염주
삼중 스님은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두 개의 염주를 가지고 있다. 한쪽은 사형을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돼 살아난 재소자, 한쪽은 사형이 집행된 재소자가 남긴 염주다. 스님은 “삶과 죽음이 항상 나와 같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사형이 집행된 재소자를 사랑했다고 했다. 1986년 8월 발생한 일명 ‘서진룸살롱’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3년 뒤 형이 집행된 고금석이 그 주인공이다. 술집에서 ‘맘보파’와 ‘서울목포파’ 일부 조직원들 간의 작은 시비로 시작된 이 사건은 유리병과 칼이 등장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당시 “일대일 싸움에서는 김두한 이후 최고”라는 이야기까지 돌던 맘보파 행동대장 조원섭과 조직원 3명이 숨졌다. 이들을 공격한 고금석과 또 다른 조직원에 대해 당시 검찰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자들”이라며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여 형을 확정했다.
그런데 삼중 스님은 고금석이 사형수로서는 기록에 남을 만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독실한 불자로 어려운 재소자를 도와가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것이다. 스님은 “지금까지도 여생을 이렇게 보낸 사형수는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죄를 받아들였고, 사소해도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스스로 나서고 싶어했다”고 회생했다.
고금석은 교정시설 밖에서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기도 했다. 동료 사형수가 후원해 오던 강원도 오지의 용소분교를 이어받아 정성을 쏟았다. 어느 날, 고금석의 정체를 모르는 한 아이가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요. 바다를 보고 싶어요”라고 편지를 보냈다. 고금석은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약속을 해 버린다. 하지만 그의 영치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인 데다 사형 집행이 수시로 있던 시기였다.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을 깨달은 고금석은 그때까지의 의연함을 잃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눈물을 흘리는 그 앞에서 “대신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해야만 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 물놀이 행사를 준비를 하던 스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1989년) 8월 4일 고금석의 사형을 집행한다”는 전화였다. 많은 사형수들을 만나며 살아온 스님이지만 고금석의 사형 집행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평생 처음 취할 만큼 술을 마셨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은 봐야 했다. 하지만 스님은 평정을 찾지 못했고, 그의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오히려 스님을 위로한 것은 사형수 고금석이었다. 사형 집행이 이뤄지기 직전 그는 “스님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스님의 지병이라도 가져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웃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죽고 열흘 뒤, 강원도 오지 아이들의 바다 여행이 성사됐다. 고금석은 전 재산 20만 원을 학교에 남겼고, 강원도 용소분교에는 그의 법명인 ‘금송’을 딴 교실이 남았다.
# 영원히 사는 법
최근 삼중 스님은 서울 구치소에서 한 사형수를 만나고 있다. 스님은 “그는 영원한 삶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그를 가르쳤지만, 나는 모르는데 그는 안다”고 말했다. 이 사형수는 14년 전부터 그림을 배워 이제는 대가가 됐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가 주최해 매년 열리는 교정대상작품전람회에서 서양화 부문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삼중 스님은 “사형수들은 아침에 살고 밤에 죽는다. 늘 내일이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림을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가 예술을 통해 참회하고 새롭게 사는 길을 찾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스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인생을 배운다”고 말했다.
삼중 스님은 눈을 감는 날까지 교화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평생을 찾은 교정시설이 인생을 깨달을 수 있는 수행장이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는 삶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