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징용됐다가 해방 맞아 돌아오던 중 이유 모를 선박 화재로 118명 수장당해
비극의 현장인 해남 황산면 옥동 삼호마을 옥동선착장 모습.
해남 옥동 선착장(옥선창)은 광부 수몰사건의 비극이 시작된 장소다. 제주도로 강제동원된 이들이 1945년 3월 새벽 갑자기 끌려가 배에 탄 곳이다. 유족회는 매년 음력 7월 16일 이곳에서 수몰사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도 지난 8월 18일 ‘합동추모제‘를 열었다. 올해 추모제는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 만에 피해지역의 민간단체 주도로 치러졌다.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황산·문내면 사회단체와 주민들이 성금을 내고 해남 예술인들은 추모공연을 재능 기부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2년 발간한 ‘전라남도 해남 옥매광산 노무자의 강제동원 피해실태 기초조사’ 보고서와 당시 생존자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살아있는 김백운 씨(90·전남 목포)의 증언(변남주 국민대 연구교수 소장 녹취록),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정윤섭 씨의 발간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옥매광산 광부수몰사건 71주년 합동 추모제.
1945년 4월, 이날도 어김없이 일터로 나온 옥매산 광산 노무자들은 각 작업장에서 정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당시 옥매산 광산에는 성수기에 1200여 명가량이 종사할 정도로 많은 노무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근 옥매산 부근의 신흥, 원문, 삼호, 옥동 등지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일했다.
이들은 이날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져 영문도 모른 채 한 장소에 모이게 됐다. 그리고는 바로 선창으로 끌려간 것이다. 그때 당시 주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해 이 일이 얼마나 은밀하고 치밀한 계획 아래 진행된 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제는 어른, 젊은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끌고 갔기 때문에 형제가 혹은 부자가 한꺼번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가족 중에는 돌아온 사람도 있고 모두 죽기도 하는 등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이들은 제주도의 모슬포에 있는 한 군인 막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각 작업장으로 배치돼 일을 했다. 이들이 일했던 곳은 지금의 모슬포 부근인 삼방산이었다고 하며 미군의 본토 공략이 임박하면서 주로 밤에 동굴이나 방어진지를 파는 데 동원됐다고 한다. 이미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이 제주도로 ‘2차 동원’된 것이다.
이들은 5개월 만에 해방을 맞자 어렵사리 배를 구해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날 순 없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 222명과 일본인 관리자 3명을 태운 배가 제주도에서 해남으로 향하던 중 완도 청산도 부근 바다에서 화재로 침몰한 것이다. 한국인 222명 중 118명이 수장됐고, 일본인 3명 중 2명도 숨졌다. 사망자의 나이는 16살부터 40대 중반까지였다.
당시 배는 이유 모를 화재로 침몰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원위원회는 2012년 발행한 보고서를 통해 “당시 선박은 석탄을 태워 가동시키는 방식이었는데, 불꽃이 발생해 근처 휘발유에 불이 붙었다 혹은 기관실에서 일본 사람들이 불을 질렀다는 말도 있었다”고 제시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박철희 해남 옥매산 희생자 유족회장.
정작 유족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사고 난 이후 현장을 지나던 일본 경비정의 대처다. 표류 8시간 만에 일본 경비정이 나타났지만 일본인 등 일부만 구조하고 118명의 광부들은 푸른 바다에 버려둔 채 현장을 떠나버렸다. 김 씨의 증언이다. “일본 배가 지나가는데, 일본 사람들하고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만 구하고 그냥 가버리더라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데.” 이 같은 참사는 생존자 김 씨 등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건 이후 황산면과 문내면은 초상집이 된다. 광부들이 떠난 항구에선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큰 굿이 2~3개월간 치러지고 한 마을에 30호 이상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유족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상태다. 돌아오지 못한 광부들의 후손들은 가난 때문에 고향을 등졌기에 당시 생존한 광부들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추모제를 면면히 이어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수십 년간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생존자와 사망자를 포함해 명단이 확인된 것도 94명뿐이다.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이 사건이 결코 잊혀선 안 된다”며 지난 수년간 해남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안타까운 역사를 기억하고 바깥으로 드러내려 안간힘을 써왔다. 그나마 2012년 옥매산 정상 일본 쇠말뚝이 발견되면서 일제강점기 광부들의 수몰 사건도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지원위원회의 기초조사와 보고서도 나왔다. 사건이 일어나고 67년이 흐른 뒤에서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의지는 미온적이다. 정부는 1957년, 2005년, 2012년 세차례 진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별다른 후속조처를 취하지 않아 유족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박철희 유족회장(62)은 “해남에 대략 60여 명의 유족이 살고 있지만 강제동원자 명단조차 아직 모르고 있다. 정부가 세 차례 조사를 하고도 추모비 하나 세우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부의 무관심은 유족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그들은 커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 마을을 떠나거나 애써 사건을 잊으려 하고 있다. 박 회장의 하소연이다. “남은 유족들이 대부분 희생자들의 손자·손녀야. 바로 아래 직계 자식들도 거의 다 돌아가셨어.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기억하는 일이 안 이뤄지면 앞으로 더 기억하기 어려워져. 가슴 아픈 일이지.” 일부 유족들이 해남 옥매산에 서린 아픈 역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여러 일을 시도하고 있는 이유다.
명반석 저장창고.
유족들은 희생자·생존자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와 추모공간을 건립하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옥선창 인근의 일본이 명반석을 저장하기 위해 세운 저장고를 박물관 형태의 추모시설로 운영할 목적으로 조선대학교 법인에 환원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3년 광업권을 취득해 일대 부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대학 법인이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문화재 등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민간업자들이 새우젓 저장이나 김치 숙성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이 저장고 매입을 시도하고 나서면서 유족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이에 유족들은 우선 사람들이 제주도로 끌려간 비극의 현장인 옥선창 인근 바다에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우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해 ‘해남 옥매산 광부 수몰사건’을 모티브로 한 <그들의 귀향>이라는 연극도 무대에 올렸는데, 이를 계기로 대중들에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문화콘텐츠 개발도 고민 중이다.
박 회장의 당부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결코 기억에서 지우려고 해선 안 된다. 다시는 이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되새김과 기억만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성환 기자 ilyo6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