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못될 바엔 ‘왕의 적’으로…
▲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최근 노무현 대통령에게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권은 대선주자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보고 있다. | ||
정 전 의장은 비록 지지율에 있어서는 한나라당 ‘빅2’에 비하면 미미한 수치이지만 그래도 범여권 후보로서는 손학규 전 경기 지사와 함께 현재 ‘빅2’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 전 지사와는 달리 범여권이나 호남에서 나름의 확실한 지분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불출마 선언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노 대통령-정 전 의장 간의 대립은 범여권 5월 빅뱅설 등 세력구도 재개편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정 전 의장의 속내에 담긴 대권 시나리오는 어떤 것일까.
지난 9일 정동영 전 의장은 기자 간담회를 갖고 친노인사들이 중심이 된 참여정부 평가포럼(참정포)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전날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을 구태정치라고 부른다면 이는 독선과 오만에서 기초한 권력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공포정치의 변종”이라는 격한 표현까지 써 가며 노 대통령을 비판했던 정 전 의장은 9일 청주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2·14 전당대회 당시의 통합 합의가 진정이었다고 선언하고 참여정부 평가포럼을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전 의장은 “참정포는 (열린우리당) 2·14 전당대회 합의를 깨고 당을 사수하려는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며 또 “호남과 충청 연합의 지역주의 정당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는 (노 대통령) 발언이야말로 지독한 지역주의”라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정가에서는 정 전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 및 친노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분석이 대세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이날 회견에 대해 “노 대통령과 비밀 회동 이후 확실한 결별선언을 한 것이 아니겠느냐”며 “참여정부 평가포럼을 대놓고 비판한 것은 노 대통령이 나름대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 전 의장의 친노 비판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 전 의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4·27 결별회동’이 언론에 알려진 직후 노 대통령이 먼저 정 전 의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노 대통령은 7일 당 해체를 주장하는 정동영, 김근태 전 의장을 겨냥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당을 깨고 만들고, 지역을 가르고, 야합하고, 정계개편을 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을 옮겨 다니던 구태정치의 고질병, 당신들이 우리당을 창당하며 국민들에게 청산을 약속했던 그 구태정치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라고 비난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과 정 전 의장의 지난달 말 청와대 면담 사실을 정 전 의장 측에서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에 대해 정 전 의장이 처음부터 의도를 갖고 회동을 요청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다. 이날 발언은 ‘비공개 만남’이 공개된 것에 대한 비판이 외적 이유였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노 대통령의 ‘대권주자 죽이기’ 연장선상에 정 전 의장도 놓여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정 전 의장은 앞으로 어떤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있을까. 우선은 노 대통령과의 대립각을 세워 나름대로 독자성을 확보하면서 지지율을 끌어 올리려는 속셈도 없다고는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범여권 통합논의가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정 전 의장이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열린우리당 탈당파 의원 11명은 지난 10일 조찬회동을 갖고 “5월 말까지 대통합의 구체적인 성과가 없으면 탈당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학진 의원은 이날 회동에 덧붙여 “5월 말까지 대통합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틀걸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필요하면 집단탈당도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이른바 ‘범여권 5월 빅뱅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도 나름대로 당대당 통합에 열린 자세를 보였다. 정 전 의장이 움직일 틈새가 커진 것이다.
더구나 열린우리당 상황은 정 전 의장에게 결단을 강요하고 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전당대회 합의 시한인 6월 14일까지 가시적인 통합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노 대통령이 ‘당의 사수’를 고수하고 있는 상황인데다 최근 노 대통령과 정동영, 김근태 두 전직 의장의 충돌로 볼 때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기 힘들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결국 정 전 의장의 탈당은 피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다고 정 전 의장이 당장 신당을 창당하기는 무리다. 더구나 김근태 전 의장과는 지금은 노 대통령에 대해 동병상련이지만 연대도 생각하기 힘들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김근태 전 의장은 천정배 의원, 정 전 의장은 김한길 대표의 중도개혁통합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한길 대표가 집단탈당이나 창당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정 전 의장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이제는 김 대표가 정 전 의장을 돕게 될 거란 얘기다.
하지만 이것이 빠른 시일 내에 현실화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정 전 의장이 탈당하더라도 김한길 의원과 곧바로 손을 잡진 않을 것이다. 연이은 집단탈당에 대한 여론의 부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나름의 지분을 가진 정 전 의장에 대해 현재 청와대도 일단 비판의 화살을 늦추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정 전 의장 핵심 측근인 김현미 박영선 의원을 청와대로 불러 정 전 의장이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진의를 파악하려 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합도 ‘제대로만 되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이 이 시점에서 발길을 돌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정 전 의장은 결국 나름대로 독자적인 위치에서 지지율 제고에 힘쓰면서 호남을 기반으로 때를 기다리며 제 정당 또는 다른 범여권 주자들과의 제휴 또는 경선을 통해 범여권 통합 후보로서 나가려 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과 사실상 결별을 선언한 정 전 의장으로부터 범여권의 빅뱅은 시작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