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비치터미널 대신 매출채권 담보로 잡은 내막 들춰보니…
한진해운 빌딩.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일요신문] 한진해운에 대한 대한항공의 600억 원 자금지원이 뒤늦게 이뤄진 이면에 재벌 총수와 전직 금융권 거물 간 힘겨루기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자금지원 대가로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을 가져오고 싶어 했지만 사외이사인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자칫 배임죄로 책임질 위험을 피하고 싶어 했다. 결과는 김 전 회장의 승리다.
2주 진통 끝에 대한항공이 600억 원을 입금시킨 조건은 2억 800만 달러(2317억 원) 규모의 한진해운 매출채권이다. 한진해운이 화물운송을 끝낸 뒤 화주에게 받지 못한 외상값이 담보라는 뜻이다. 2317억 원 가운데 3분의 1만 회수해도 대한항공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다. 손해가 아니면 돈 빌려주기로 결정한 이사진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
당초 조 회장이 600억 원을 빌려주면서 담보로 가져오려 했던 자산은 한진해운이 가진 미국 롱비치터미널 지분이다. 롱비치터미널은 미국 서부 물동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 미래에 안정적인 현금창출원이 될 수 있는 알짜 자산이다. 한진해운 지분율은 54%로, 최대주주로 경영권까지 갖고 있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 신청을 하기 전에도 시장에서는 대한항공이 롱비치터미널 지분을 매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롱비치터미널은 한진해운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정부와 맺은 계약 탓에 대한항공이 살 수는 없었다. 결국 조 회장은 600억 원을 빌려주는 대신 롱비치 지분을 담보로 잡는 전략을 택했다. 당장 현금화하기는 어렵지만 법정관리인 한진해운이 돈을 못 갚거나 안 갚으면 알짜 중의 알짜인 롱비치터미널은 한진그룹 소유가 된다.
금융권 출신인 김승유 전 회장이 이 같은 조 회장의 속셈을 몰랐을 리 없다. 결국 롱비치터미널을 담보로 돈을 줬다가는 자칫 떼일 수 있고, 이는 결국 이사진들의 배임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롱비치터미널을 담보로 잡으려 해도 돈을 빌려준 해외 6개 금융기관 및 롱비치터미널 2대주주(지분율 46%)인 스위스 해운사 MSC의 동의도 필요하다. 여러 모로 600억 원을 전액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반면 매출채권은 현금화 및 담보 설정 절차가 수월하다. 결국 사외이사들은 롱비치터미널을 탐내는 조 회장의 뜻을 꺾고, 배임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매출채권을 담보로 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해운을 최은영 회장으로부터 떼어내 대한항공 아래로 편입하면서 알짜 담보를 신용채권으로 바꿀 때도 현 사외이사 대부분 찬성했다. 당시와 달리 ‘법정관리 신청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붙다 보니 사외이사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 회장의 뜻을 꺾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풀이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