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한 박지성은 일본 2부리그 시절의 어려움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 다. 이종현 기자 | ||
6일 네덜란드로 출국한 박지성(22•PSV 에인트호벤)은 여전히 쑥스럽고 무표정한 얼굴로 장도에 올랐다. 출국 소감과 목표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공식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얼굴에 잔뜩 난 여드름이 카메라에 너무 크게 잡힐까봐 걱정이 앞서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J리그 생활을 최종 정리하는 마지막날(1월1일) 드라마틱하게 전 소속팀 교토 퍼플상가에 우승컵을 안겨주고 돌아온 박지성의 2002년은 월드컵이 있었기에 살 만했고 2003년은 미지의 세계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대 반, 걱정 반이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난 2일 수원 집에서 만난 박지성과의 데이트를 지면으로 옮겨 본다.
무덤덤, 무뚝뚝함의 극치를 이룬다. 어머니와 친척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식사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만 입에 갖다댈 뿐이었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박지성을 태운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걸 확인하고 ‘버선발’로 뛰어내려갔지만 부자지간의 인사는 그저 눈으로만 그칠 뿐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다.
박지성의 성격을 헤아리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좋은 성적과 인기를 얻고 돌아온 날의 해후치고는 너무나 썰렁했다. 박지성이 도착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집으로 쳐들어왔다고 한다. ‘지성 오빠’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때문.
박지성의 휴식을 염려한 아버지가 “오늘은 지성이가 바로 이곳에 오지 않고 서울에서 머물 것”이라며 미안한 거짓말을 했는데 한 여학생은 제주도에서 왔다며 눈물을 글썽이고 돌아가 아버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인터뷰는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소감을 묻는 걸로 시작했다. “정말 시원섭섭해요. 처음 일본 갔을 때는 팀이 2부리그로 떨어진 상태라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1부리그 승격 후 첫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올 수 있어 기분 좋았어요. 극적이었죠. 피날레를 동점골로 멋지게 장식할 수 있었으니까.”
박지성이 교토를 떠난 날 일본팬들이 눈물 바다를 이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하자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인기가 장난 아니었죠”라는 농담을 던진다. 월드컵 이후 박지성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교토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엄청난 팬들을 끌어 모았던 게 사실이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발걸음을 잠시 주춤거리게 했던 이유도 일본 팬들의 사랑과 어렵게 자리잡은 J리그 내에서의 위상이었다.
일본에선 ‘용병’에 불과한 축구선수 박지성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응원을 보내준 데 대한 감사함과 열심히 뛴 만큼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여건을 저버리기가 아까웠던 것.
▲ 위쪽부터 일본에서 귀국해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한 박지성, 월드 컵 포르투갈전 때 첫골을 넣고 히딩크 당시 대표팀 감독과 감격적 인 포옹을 하는 장면, 오른쪽은 지난해 일본교토 퍼플상가에서 활 약 하던 박지성의 모습. | ||
사실 그의 부모는 네티즌들의 오해가 두려워 드러내놓고 박지성의 일본 잔류를 요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은 일본에서 좀 더 뛰어주기를 바랬다. 준비없이 서둘러 발을 내딛었다가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좌절을 겪게 될지 모를 아들이 걱정스러웠고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달려온 축구인생에서 회복하기 힘든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처음 일본 도착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사실 휴학하고 떠난 탓에 프로 생활에 대한 환상이 두려움보다 더 컸어요. 우선 돈도 벌 수 있잖아요.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심장이 떨릴 만큼 감동적이었어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거예요. 두려움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도전을 감행했던 무지가 지금의 날 있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박지성은 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성격까지 바뀌었다고 말한다. 동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아는 척을 하며 적극적인 대인관계에 나서는 등 새로운 박지성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울였다. 박지성은 일본 선수들 앞에서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선후배 사이의 엄격한 위계 질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는 데 제약을 받지 않아 좋았다. 만약 한국에서와 같은 인간 관계가 요구됐다면 적응하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도 일하시느라 일본으로 건너오지 못하셨어요. 처음부터 혼자서 생활했죠. 숙식 문제의 불편함보다 외로움을 견디는 게 정말 어렵더라구요. 가끔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었어요. 그나마 (안)효연이형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좋았죠. 어려울 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저 혼자 떠나와 조금 미안했어요. 몇 년 후 효연이형이 나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좋은 조건으로 활약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죠.”
박지성은 아무래도 일본에 두고(?) 온 안효연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2년여 동안 동고동락하며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선배라 서둘러 짐을 싸 귀국한 모양새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잠시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만약’이라는 가정 하에 다섯 가지 준비된 질문을 했다.
제일 첫 번째 질문이 ‘만약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5분 정도 고민을 하다가 “너무나 엄청난 일인데요”하면서 “남북을 통일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일 것 같다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만약 내가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다면’에 대해선 “우승”이라고 짤막하게 표현했고 ‘만약 내가 축구선수가 안되었다면’의 질문엔 “대학생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줄 알고 이유를 묻자, “나이를 따지면 지금쯤 대학 3∼4학년이 어울리지 않겠느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내가 만약 결혼한 남자라면?’ “인터뷰하고 있는 이 시간에 아내와 있겠죠.”, ‘내가 만약 톱탤런트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다면?’이라고 묻자 프러포즈의 뜻에 대해 되묻는다. 즉 결혼하자는 프러포즈인지 아니면 데이트하자는 제안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일단 데이트하는 걸로 정하자고 말했더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가 어떻게 나한테 프러포즈하겠어요? 하지만 톱탤런트라면 한 번은 만날 것 같아요. 대신 결혼을 전제로 한다면 만나지 않겠어요”라며 선을 긋는다.
▲ 지성아 같이 가자 월드컵 때 ‘찰떡궁합’을 선보인 송종국과는 이제 네덜란드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 ||
“‘사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관계예요. 소개를 해줘서 딱 한 번, 그것도 잠깐 얼굴만 봤을 뿐인데요.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지만 연락 안하고 있다가 신문에 열애설 기사가 나온 다음에 전화해봤어요.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어처구니없이 웃었던 게 전부예요. 사실 지금 내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못되잖아요. 자주 볼 수도 없고, 고작 하는 건 전화통화가 전부인데 그런 관계가 오래 이어질 수 없다는 건 뻔한 사실 아니에요?”
인터뷰를 하는 도중 예전 아버지한테 들었던 어린시절 에피소드 한 토막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춤 잘 췄다면서요?” “제가 생각해도 꽤 잘 췄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님과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가수 박남정씨 춤을 흉내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알지도 못하는 아저씨들이 절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춤을 추라고 강요해서 창피하고 속상한 나머지 크게 상처받았던 모양이에요. 그후론 성격도 변하고 사람들 앞에선 절대 춤도 추지 않았어요. 부모님이 그때 나이트 클럽에만 안 갔더라면 지금 제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월드컵 하면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반전과 역사를 만들었던 월드컵을 회상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올지 잔뜩 기대가 되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엄청난 일들을 경험해서 솔직히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아, 이건 처음 공개하는 건데 사실 전 우리나라가 결승전에 진출할 거라고 믿었어요. 이유요? 그냥 분위기가 그랬어요. 사실 16강 진출도 상상 밖의 일이었잖아요. 매번 기대를 깨는 이변을 일으킨 터라 독일전을 준비하며 체력은 최악이었지만 내심 기대가 컸었죠. 그래서 아버지한테 일본에서 사용했던 휴대폰을 찾아서 경기장으로 갖고 오라고 전화를 걸었어요. 독일을 꺾고 요코하마로 가게 되면 일본 친구들한테 자랑삼아 전화를 걸려고 했던 거죠. 너무 욕심을 부렸었나봐요.”
네덜란드로의 출국을 앞둔 사람이었지만 일부러 각오를 묻지 않았다. 열심히 하는 것 외엔 특별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일본에 진출하면서 세웠던 유럽 무대의 꿈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기 때문에 앞으로는 빅리그 진출을 위해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접고 닥친 현실에 적응하겠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일본 진출할 당시 국내 언론에는 최연소 해외진출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한동안 ‘박지성’이란 이름이 꽤 오랫동안 신문에 오르내렸죠. 그러다 팀이 2부로 떨어지니까 몇 개월 동안 나에 관한 기사가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더라구요. 정말 씁쓸했죠. 특히 버스 타고 40게임을 소화하기 위해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때론 시골 오지 학교의 운동장에서 공도 찬 적이 있어요. 내 몸을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가끔 내가 자만해지려고 할 때마다 2부리그 시절의 어려움을 떠올려요. 네덜란드 진출도 처음부터 잘 풀리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포기나 좌절은 하지 않을 겁니다. 물도 빠지지 않는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도 공을 찼는데요, 뭘.”
네덜란드로 출국하는 날 아침, 박지성은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젠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 기분 좋다고. 송종국이 먼저 가서 활약중이고 조만간 이영표도 에인트호벤에 합류할 예정이라 큰 힘이 되는 모양이다. 좋은 성적 냈을 때, 박지성이란 이름을 제대로 인정받았을 때, 네덜란드로 인터뷰하러 오라고 말하는 스물 두 살 청년한테서 ‘겸손’과 ‘순수’가 가장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