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회사 건물 임대료를 체납해 건 물주에게 소송을 당한 심형래씨. 지난 16일 자신의 영화 사‘영구아트’를 찾은 학생들에게 새 영화에 대해 설명 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지난 80년대 ‘개그계의 황태자’에서 90년대 ‘영화제작자 겸 감독’으로 변신을 거듭했던 심 사장. DJ정부 들어 신지식인 1호로 지정되면서 잘나가던 그의 심사가 요즘 극히 불편하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주로부터 ‘임대료가 장기 연체됐으니 사무실을 비워 달라’는 통지가 날아들었다. 사무실을 비워주지 않자 건물주(쌍방울)측에서 올해 1월 심 사장이 경영중인 영구아트를 상대로 사무실을 비우라는 명도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연체된 임대료가 아니다. 현재 제작중인 블록버스터 영화 <디-워>(D-WAR: Dragon-War의 약자로 ‘용의 전쟁’)의 제작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되면서 그의 마음은 노심초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내년 7월 개봉 예정으로 4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들어갔다. 현재까지 이 영화에 쏟아부은 돈은 무려 1백10억원에 달한다. 해외에서 10억달러를 벌어들이겠다고 자신해온 대작이기도 하다.
그는 <일요신문>과 만나 영화제작, 임대료 체납, 소송에 휘말린 사연 등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위치한 (주)영구아트 사옥이었다.
2천8백여 평 부지에 세워진 이 회사 건물을 들어서면서 느낀 첫 인상은 ‘첨단 문화산업’이 숨쉬는 그런 ‘첨단 공간’이 아니었다. 회사의 외곽 담벼락은 두꺼운 천으로 빙 둘러쳐져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린 건물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형편없이 부서져 있었다. 주차장 여기저기 움푹 패인 바닥도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초대형 SF 영화가 제작된다는 것인지 납득되지 않았다.
취재진은 안마당으로 더 들어갔다. 그러자 정면에 ‘용가리’ 조각상이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이 회사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그제서야 여기가 지난 99년 만들어져 세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SF영화 <용가리>가 탄생한 곳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마침 수십 명의 방문객들이 회사 관계자의 인솔 아래 사옥을 둘러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을씨년스러웠던 회사 정문 쪽의 모습과는 달리 생동적이었다. 3층짜리 본관 2층에 위치한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 위는 영구아트에서 새 영화 <디-워>를 위해 제작한 미니 어처.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SF영화를 만드는 영구아트의 사옥 바깥은 천으로 빙 둘러쳐져 있다. 건물주와의 갈등 때문에 내부에는 파손된 곳도 있다. | ||
영구아트는 현재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회사 부지와 건물의 주인인 쌍방울로부터 명도소송에 걸린 상태. 쌍방울측은 지난 1월 임대료 체납과 임대차 계약 해지 이후에도 ‘무상 점유’했다는 사유로 서울민사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영구아트와 쌍방울의 임대계약기간은 지난 98년 3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였다. 이미 계약기간이 만료된 상태다. 영구아트측이 지난해 초부터 5월 현재까지 임대료와 연체이자 등 모두 10억여원을 연체했다는 게 쌍방울측 주장이다. 다음은 심 사장과의 일문일답.
―쌍방울이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난 1월 쌍방울에서 소송을 제기했더군요. 물론 임대계약이 끝나면 당연히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SF영화 <디-워>의 촬영 때문입니다. 우리는 4년 동안 이 영화 제작을 위해 무려 1백10억원이나 투입했습니다. 영화에 필요한 미니어처(건물이나 인물 등의 모형물)도 90%나 제작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미니어처라는 게 일반 상품을 옮기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미니어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니어처가 파손되기 때문이죠. 영화를 찍으려면 여기서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촬영을 끝날 때까지만 여기를 임대해달라고 (쌍방울측에)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쌍방울측에선) 지난해 12월 E기업에 매각했더군요. 그리고 1월에 소송을 제기했던 겁니다.
우리한테는 매각되기 전에 한마디 사전 통보도 없었습니다. (쌍방울에서) 굳이 이 땅과 건물이 필요했다면 우리가 이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는 줘야할 게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회사 건물과 부지가 매각되기 전에 쌍방울과 타협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우리가 한때 사정이 어려워 임대료를 조금 연체하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초 우리한테 회사를 이전해달라는 공문을 보내왔더군요. 임대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죠. 그래서 쌍방울에 재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비워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임대료를 내지 않았던 겁니다. 그게 지금까지 누적된 거죠.
▲우리 회사 직원이 90여 명입니다. 이 직원들의 기숙사(회사 내 다른 건물)도 운영하면서 월급을 주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디-워> 제작에만 1백억원 이상을 쏟아 부었습니다. 또 구체적으로 어딘지 밝힐 순 없지만 일본의 한 기업에선 거액을 투자할 의사가 있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5억∼6억원 정도의 임대료가 연체된 것 때문에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할 순 없죠. 그런 건 아닙니다.(여기서 영구아트와 쌍방울이 주장하는 연체 임대료가 차이 난다. 이는 연체 임대료와 연체이자 등의 산정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소송이 진행되면서 밝혀질 것이다.)
―쌍방울과는 각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든 영화 <용가리> 캐릭터를 쌍방울에 넘겼어요. 쌍방울에서 만드는 언더웨어에 사용하라고요.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의 가치는 있죠. 또 이번에 제작중인 <디-워>의 캐릭터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철거반까지 동원했고, 포크레인으로 회사 주차장까지 파헤쳤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건물을 부수고 마당을 파헤치면서 생긴 진동으로 미니어처에 금이 갔어요.(이 회사 입구의 건물이 부서지고, 땅이 움푹 패였던 이유다.) 그것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벌써 촬영에 들어갔어야 합니다.
쌍방울에서도 그동안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인지 전북 지역에 부지를 마련해준다고 하더군요. 그쪽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냐고요. 하지만 좀전에도 말했듯이 어떻게 미니어처를 옮길 것이며, 나를 포함해 우리 직원들이 어떻게 그곳까지 출퇴근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성이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우리도 임대연장소송을 제기할 생각입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이사할 곳을 물색해 봐야죠. 지금도 찾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기 전에 이사해야 한다면 미니어처 옮기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솔직히 영화가 끝난 다음에 이전하면 좋겠습니다.
소송과 관련된 얘기를 마친 심 사장은 <디-워>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된 <디-워>의 테스트 필름을 보여줄 때의 표정은 좀전과 사뭇 달랐다. 훨씬 생기가 돌았다.
“우리 자체 기술로 컴퓨터그래픽으로는 제작하기 힘든 장면들을 만들었다”라는 말을 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의 눈빛과 말투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익히 보아왔던 바보 ‘영구’가 아니었다. 기자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문용어를 거침없이 구사할 때는 ‘영화감독’ 심형래였다. “영화 <스타워즈>와 <쥬라기 공원>은 게임도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날 창원대학교 문예정보학과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심 사장은 학생들 앞에서 ‘짧은 강연’을 할 기회를 가졌다. 심 사장이 60여 명의 학생들 앞에 서자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아마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개그맨을 직접 만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심 사장은 학생들 앞에서 시종 진지했다. ‘영구’ 심형래를 기대했음직한 학생들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심 사장은 역시 <디-워> 설명부터 시작했다. 그는 또 “우리만의 테크놀러지를 만들어서 미국과 일본 영화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며 제법 ‘신지식인’다운 면모도 보였다. ‘저 사람이 개그맨 심형래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기우(杞憂) 때문이었을까. 심 사장은 회사의 건물과 주차장이 ‘망가져 있었던 사연’에 대해서도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는 “임대료를 못 낸 게 아니라 안 낸 거다”며 “(쌍방울에서) 영화를 찍을 때까지는 시간을 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을 인솔한 창원대 문예정보학과 조철희 교수(39)는 “영구아트는 기대했던 것보다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오너(심 사장)가 단순히 돈벌이만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언제부턴가 심형래는 ‘개그맨’이라는 딱지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제작자 겸 감독’ 심형래로 거듭난 것이다. 아침 10시에 출근해 자정에나 퇴근한다는 그다. 방송 출연도 힘든 상황. 일요일 방영되는 <쇼 행운열차>에만 얼굴을 비치고 있다.
그는 “내년 7월 개봉할 예정인 <디-워>로 해외시장에서 10억달러를 벌어들이겠다”고 야심 찬 포부를 밝힌다. 그렇지만 현재의 소송 문제로 그의 심사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