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가 ‘침묵’에서 깨어나 지난 5월25일 전격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사수’를 외치고 나섰다. 사진은 지난 5월7일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한 전 대표.국회사진기자단 | ||
지난 25일 한화갑 전 대표의 기자회견을 접한 한 측근의 촌평이다.
민주당 대표직에서 사퇴한 지 석 달여. 그동안 당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한화갑 전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 주류를 향해 본격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한 전 대표는 그동안 언론에 언급된 ‘신주류’와 ‘구주류’의 구분에 대해 잘못된 분류라고 일침을 놓았다. 모 방송사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는 “정당에 당권을 장악한 주류와 당권에서 소외된 비주류는 있어도, 신주류는 뭐고 구주류는 또 뭐냐”며 “나는 비주류”라고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인적청산’ ‘민주당 해체’를 요구하며 당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민주당 ‘주류’들이 ‘신당 창당’ 수순에 돌입하며 막바지 세몰이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당내 영향력이 있는 한 전 대표가 ‘비주류’임을 자처하며 제동을 걸고 나섬으로써 민주당 신당 논의는 중대 고비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95년 DJ가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던 때와, 지금 민주당 주류들이 신당을 창당하겠다며 나서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다.
DJ는 정계복귀 명분으로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내세워 국민회의를 창당했지만, 지금 민주당 주류들처럼 당을 깨고 새 당을 창당하지는 않았다. 통합민주당 외곽에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동참할 사람은 동참시키는 창당이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주류의 신당 창당은 무엇인가. 내부적으로 민주당 해체를 주장하면서, 인적청산을 하겠다는 것이 당을 깨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DJ는 최소한 민주당의 정통성, 그리고 마포 당사 등 재산, 당원 대의원 등 민주당 ‘자산’을 그대로 남겨두고 자신의 정당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 주류의 창당 논의는 어떠한가. 민주당을 깨고, 또 맘에 들지 않는 인사들은 배제하겠다며 큰소리 치고 있지 않은가.
신당을 하고 싶은 사람은 조용히 나가 신당을 만들면 됐지, 왜 자꾸 민주당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인가. 명백히 신당 창당이 정치개혁 정당개혁을 앞세워 당권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한화갑 전 대표의 한 오랜 측근은 민주당 주류 중심의 신당 창당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95년 DJ식 신당 창당보다 훨씬 더 명분도 약하고 절차도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다음은 이 측근 인사의 신당 작업에 대한 견해다.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킨 이후 민주당 당권을 장악한 주류들이 벌인 일들이 뭔가. 당개혁 특위를 구성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개혁안을 마련하더니, 이를 스스로 무시하고 신당 창당 작업에 몰입하지 않았나. 이제는 당헌 당규에도 없는 통합신당 추진기구를 만들어 세몰이를 하고 있는데,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는 당원들이 이 같은 행태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아보기나 하고 있나. 신당 창당이든 민주당 해체든 당의 진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결정은 어디까지나 전당대회를 통해 당원들의 의사를 묻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주류들은 그것을 안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ABC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무슨 정치개혁이고 정당개혁을 하겠다고 나선단 말인가.”
▲ 한 전 대표는 신주류 대표주자인 천정배 정동영 의원(가 운데 두 사람)도 실은 ‘구주류’였다고 주장했다. | ||
한 전 대표는 2000년 8월 전당대회와 지난해 4월 전당대회를 통해 두 차례 1등으로 최고위원에 당선된 바 있다. 민주당 당원들로부터 두 차례나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당권을 장악한 주류 인사들은 현 민주당 대의원들로는 신임을 받기 어려운 처지다.
왜냐하면 외형상 민주당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김원기 고문은 95년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하던 당시 민주당에 잔류, 노무현 대통령 등과 함께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했던 ‘민주당 잔류파’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대철 대표 역시 국민회의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국민회의 시절과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이후에도 줄곧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비주류로 남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김원기 고문, 정대철 대표 등이 민주당 ‘간판’으로 부상하며 주류그룹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민주당 대의원 구조는 여전히 DJ 중심으로 짜여져 있는 상태다.
즉 민주당 주류 인사들이 신당의 전제조건으로 ‘기득권 포기’를 요구하는 데에는 이 같은 현실 인식이 깔려 있다. 상부 지도부만 교체되었을 뿐, 하부구조가 과거 DJ 중심의 민주당 대의원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갑 전 대표가 민주당 주류 주도의 임시 지도부 구성 주장에 반대하며 전당대회를 주장하고 나선 배경에는 이 같은 현실적 상황 판단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개로 한 전 대표는 신주류, 구주류 구분에 대해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도 한 전 대표 나름대로의 ‘정치논리’가 담겨 있다.
신주류가 새롭게 주류를 형성한 그룹을 뜻한다면, 구주류는 과거에 주류를 형성했던 그룹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 신·구주류 구분은 신주류=친노무현=개혁 등으로 해석되는 반면, 구주류=반노무현=반개혁으로 해석되는 측면이 강하다. 한 전 대표가 신·구가 아닌 주류, 비주류 구분을 들고 나온 배경이다.
한 전 대표는 신주류 대표주자로 부상한 정동영 신기남 천정배 의원 등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DJ 정부에서 소위 잘나가던 주류 출신들이 대선과정을 거치면서 신주류로 둔갑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정동영 의원의 경우 DJ정권 하에서 대변인,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한동안 주류그룹을 형성했고, 2000년 총선 공천과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의원 역시 DJ정권 들어 각각 대변인, 원내수석부총무 등을 맡으며 한동안 주류로 활동한 바 있다.
▲ 지난 4월30일 신당 창당 논의를 위해 모인 민주당 열린개 혁포럼 소속 의원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민주당 주류 인사들이 쉽사리 민주당 외곽에서 신당을 추진하지 못하는 데에는 상부와 하부가 유리된 당 구조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민주당 주류 인사들이 탈당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의원과 대의원들이 동참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위험부담이 큰 ‘선 탈당, 후 신당 추진’보다는 ‘선 신당추진, 후 민주당 해체’의 수순을 밟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부 대의원의 상당한 지지를 받은 바 있는 한 전 대표가 ‘민주당 잔류’를 선언하고 나섬으로써 민주당 신당 창당 논의에는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민주당 주류 중심의 신당 창당 논의에 대해 관망하던 중도파 의원들이 이런 움직임에 가세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한 재선의원은 “신당을 강력하게 추진하자는 쪽이 한 20여 명(의원급) 된다면, 민주당을 사수해야 한다는 쪽도 그만큼 된다”며 “한화갑 전 대표의 당 사수 방침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신당 논의가 주춤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한 전 대표가 ‘민주당 잔류’를 천명하는 기자회견을 감행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거듭된 국정운영의 미숙을 비판하는 현재의 여론 기류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물연대 파업사태와 한총련 사태, 그리고 대미외교에 대한 비판 등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드러난 국정운영 난맥상에 대해 총체적 비판이 제기되면서 한 전 대표의 발언에 상대적으로 힘이 실렸다는 분석이다.
‘책임있는 집권여당’의 모습을 강조하며 신당을 추진하는 민주당 내 주류를 공격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노무현 대통령과 민주당 주류세력을 향해 포문을 연 한화갑 전 대표는 당분간 사태 추이를 관망하며 조용히 세 확산 작업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주류 인사들이 신당을 창당한다고 하지만, 내년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현역의원들은 개인의 이익과 합치될 때라야 합류할 것”이라며 “호남 유권자들의 지지가 다소 이탈하더라도 영남의 지지를 얻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주류 중심의 신당 창당에 얼마만큼의 의원들이 흔쾌히 동참할지는 미지수”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지난해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탈당했다가 ‘낭패’를 당한 의원들의 선례가 주류 신당 추진파에게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내다봤다.
이 측근 인사는 또 “한화갑 전 대표가 민주당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자연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며 다소 낙관적인 기대를 내비쳤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전 ‘불명예 퇴진’했던 한화갑 전 대표가 석 달 만에 가장 뜨거운 정치 현장에 컴백했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주류였던 그가, 스스로 ‘비주류’임을 자처하고 ‘민주당 사수’를 천명하며 내던진 승부수가 어떤 모습으로 귀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